강 론 말 씀

2016년 4월 21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파르참의 성 콘라도 수도자, 성 안셀모 주교 학자)

dariaofs 2016. 4. 21. 06:11



성 콘라두스(Conradus, 또는 콘라도)는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Bayern)의 파르참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배우지 못한 시골 사람이지만 매우 신심이 깊었으며 아홉 자녀를 두었는데 콘라두스는 막내둥이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 속에서 성장하였다. 양친을 여읜 후 31세의 나이로 카푸친회 평수사로 입회하여 1852년에 서원을 발하였다.


그 후 그는 40년 동안 문지기 수사로서 봉사했는데, 순례자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애덕과 인내를 실천하며 사도적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었다.


그는 특히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은혜를 받았고 미래의 일을 알리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사후 40년이 되는 1934년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1033년 겨울 이탈리아 북부 아오스타(Aosta)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안셀무스(Anselmus, 또는 안셀모)는 15살 되던 해에 수도원에 입회하려 하였으나 부친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1056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Bourgogne)로 공부하러 집을 떠났고, 1059년에는 노르망디(Normandie)의 베크(Bec)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도원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당시 수도원 원장은 란프랑쿠스(Lanfrancus)로 안셀무스는 그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1060년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정식으로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1067년에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된 성 안셀무스는 제자인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서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고, 윤리 교육과 종교 교육에 힘씀으로써 베크 수도원 학교를 명문 학교로 발전시켰다.


1078년에 수도원 원장이 된 그는 박학다식과 성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수많은 청년들이 베크 수도원으로 몰려들자 그들을 한곳에서 교육할 수 없어 프랑스와 영국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스의 경계를 넘어 영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성 안셀무스는 란프랑쿠스가 사망한 뒤 영국 왕 윌리엄 2세(William II Rufus)에 의해 1093년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성 안셀무스는 이때부터 적지 않은 분쟁에 휩싸였다. 영국 국왕의 교회 직무에 대한 간섭에 반발하고 교황의 권위를 위해 투쟁하며 성직자들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국왕은 물론 다른 많은 주교들로부터도 배척을 받게 되었다.


안셀무스는 1093년까지 베크를 떠나지 않고 국왕 윌리엄 2세와 격렬한 논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1097년 영국을 떠나 로마로 망명을 갔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Urbanus II, 7월 29일) 역시 윌리엄의 요구를 반대하자, 윌리엄은 안셀무스를 유배시키겠다고 위협하였으나 끝내는 안셀무스의 귀국을 허용하였다.


1098년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요청에 따라 성 안셀무스는 바리(Bari) 공의회에 참석하였으며, 성령을 두고 벌인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필리오퀘'(filioque) 논쟁을 조정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1100년에 윌리엄 2세 국왕이 사망하자 안셀무스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또 다시 윌리엄의 후계자인 헨리 1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지 않아 1103년에 다시 로마로 망명길에 올랐다. 1102년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공의회에서 안셀무스는 노예 매매를 극렬히 비난하였다.

그는 영국 국왕을 상대로 하여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바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 그 당시 그는 위대한 신학자요 '스콜라 학파의 아버지'란 칭호를 이미 얻고 있었다.


그는 계시와 이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으며, 아리스토텔리스파의 변증법에서 이용하는 이성주의를 신학에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인간의 개념에서부터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한 “독어록”(獨語錄, Monologion)의 저자이다. 이 사상은 후대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데카르트(Descartes) 그리고 헤겔(Hegel)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성 안셀무스의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는 중세의 강생에 관한 신학 논문 중에서는 가장 돋보이는 대작이다.


그의 저서 중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De fide Trinitatis), “동정녀 잉태론”(De Conceptu Virginali), “진리론”(De Veritate) 그리고 400여 통의 편지와 기도 및 묵상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다. 그는 1109년 4월 21일 캔터베리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492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Alexander IV)에 의해 시성되었고, 1720년에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단테는 신곡의 천국 편에서 태양권 안에 있는 빛과 힘의 영들 가운데 안셀무스를 언급할 정도였다. 성 안셀무스의 상징은 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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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올해 <자비의 특별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가 되는 대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교회가 왜 지금 <자비의 희년>을 지내는지

생각해봐야 하는데 이에 대해 자비의 해 교황회칙 <자비의 얼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인용합니다.

 


현대의 사고방식은 과거의 사고방식보다 훨씬 더 자비의 하느님에

대립하는 듯하며, 자비라는 이념 자체를 생활에서 배제하고

인간 마음에서 제거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하는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는

자비란 마음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뇌리에서부터, 아니 입술에서부터

배제해야 하는 단어가 되었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자비를 일부러 배제하고,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다보니

자비라는 것이 아예 없었던 듯,

자비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듯 현대인은 모두

자비 불감증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심히 비관적인 생각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렇게 비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가 비록 남에게 자비롭지 못할지라도 나는 자비를 받기 원하고 있고

우리 인간은 자비롭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니

받지도 못할 것 바라지도 말자고 아예 잊고 살자는, 그런

경직되고 완고해진 우리 마음만 우리가 바꾸면 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비롭지 못해도 하느님은 자비롭고,

자비는 하느님의 본질이시기에 자비하실 뿐 아니라 자비 그 자체이시고,

그러기에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 자비의 역사입니다.

 


이에 대해서 회칙 <자비의 얼굴>은 시편 136편을 인용합니다.

이 시편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자비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를 다음과 같이 후렴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빛들을 만드신 분을.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낮을 다스리라 해를 만드신 분을.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밤을 다스리라 달과 별들을 만드신 분을.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집트의 맏배들을 치신 분을.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을 그들 가운데에서 이끌어 내신 분을.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같은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뽑으시고, 들어 높이시고,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시고, 판관을 세워주시고, 왕을 세워주셨는데

그때까지 450년이 걸렸다.”고 그 긴 기간을 얘기한 다음 이어 말합니다.

하느님은 약속하신 대로 예수를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450년뿐이겠습니까? 136편 시편처럼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지요.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만 자비로우시겠습니까?

모든 민족에게 자비하시고, 모든 이에게 자비하시지요.

죄 없는 사람에게만 자비로우시겠습니까? 죄인에게도 자비로우시고,

죄인에게 당신 자비가 더 필요하니 죄인이 당신 자비 받기를 더 원하시지요.

 


사실 우리의 더 큰 죄는 이웃에게 자비롭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은 것이고,

필요 없다고 자비를 거절한 것이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마저도 거부하고 죽일 정도로

하느님의 자비를 걷어찬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자비롭지 못한 것도 죄이지만

하느님의 자비를 거절한 것이 더 큰 죄인 이유는

그것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자비로울 수 없게 만들고,

자신은 이웃에게 자비롭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린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받아야

그 자비로 이웃에게도 자비로울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거절하면 하느님께서 아무리 자비를 베푸시려고 해도

자비로울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주고픈데 사랑의 기회를 주지 않는 자식처럼

자비로우신 하느님에게서 자비의 기회를 박탈하는 우리가 아닌지

반성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