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의 아시시 태생인 에지디우스(또는 에지디오)는 성 프란치스코의 초기 동료 가운데 한 명으로 1208년에 수도복을 받았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를 수행하여 아시시 지방의 여러 곳에 복음을 전하였고,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순례를 비롯하여 로마(Roma)와 예루살렘(Jerusalem) 성지를 방문하였으나, 사라센인들을 회개시킬 목적으로 갔던 튀니스(Tunis) 여행은 실패로 끝났다.
튀니스의 신자들은 그의 뛰어난 신앙심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까봐 그를 억지로 배에 태워서 돌려보냈다고 전해온다.
그 후 그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살았는데, 1243년경부터는 몬테 라피드(Monte Rapido)의 은둔소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자주 탈혼하였고 체토나(Cetona)에서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았다. 그는 초기 프란치스코 회원들의 모델로서 존경받는다.
성 프란치스코의 잔꽃송이에 그에 대한 행적이 나오는데, 성 프란치스코는 그를 ‘원탁의 기사’로 불렀다. “에지디우스 수사의 금언”이란 책에서는 그의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낙천주의 그리고 뜻 깊은 유머가 빛을 발한다. 그는 질(Giles)로도 불린다.

성 게오르기우스(Georgius, 또는 제오르지오)는 영국, 포르투갈, 독일,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특히 베네치아(Venezia)와 페라라(Ferrara)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으며, 군인과 보이 스카우트의 수호자이고 동방 교회에서 ‘위대한 순교자’로 공경을 받는 성인이다.
그러나 성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그가 콘스탄틴 대제 이전에 팔레스티나(Palestina)의 디오스폴리스(Diospolis)라고도 불리던 리다(Lydda)에서 순교하였다는 것과 황제 근위대의 군인이었다는 것뿐이다.
그 외에는 6세기경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신화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성인에 관한 이야기로 유명한 것이 “황금 성인전”(Legenda Aurea)에 언급된 용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인이 어느 나라를 지나다가 어떤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은 용의 제물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나라는 계속 어린 양을 용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양들이 다 바닥나자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돌아가면서 딸들을 바치다가 공주의 순서가 되자 그 하녀가 대신 제물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성인은 하녀와 함께 기다리다가 용이 나타나자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용을 붙잡았다. 이때 성인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다면 용을 죽이겠다고 하자 왕과 백성들이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창으로 용을 찔러 죽였고 왕을 비롯한 15,000명이 세례를 받았다. 성인은 왕국의 반을 주겠다는 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하느님의 교회들을 잘 돌보고 성직자들을 존경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그 나라를 떠났다고 한다.
7-8세기에 영국에 알려진 성인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영국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중세 이후에는 기사도와 군인들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성인의 문장은 흰 바탕의 붉은 십자가인데, 현재 영국 해군에서 사용하는 기장이 바로 하얀 바탕에 붉은 색으로 커다란 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가가 그려진 모양이며, 이는 영국 국기(유니언 잭) 도안의 일부이기도 하다.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 또는 아달베르토)는 보헤미아(Bohemia)의 리비체(Libice)에서 출생하고 그다인스크(Gdansk)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마그데부르크(Magdeburg)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견진성사를 받을 때 그의 스승이자 마그데부르크의 초대 대주교인 아달베르투스의 이름을 따 세례명을 보이테크(Vojtech)에서 아달베르투스로 바꿨다.
981년 스승이 사망하자 선교활동과 성직자 개혁의 원대한 이상을 품고 보헤미아로 돌아와서, 이듬해 30세가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프라하의 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는 체코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라하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사목적, 정치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로마(Roma)에 수차례 사표를 제출하였고, 보헤미아의 대공 볼레슬라프 2세와의 충돌로 인해 로마로 가서 '성 알렉시우스(Alexius)와 보니파티우스(Bonifatius)의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프로이센(Preussen) 지방의 이교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유럽 북동부 발트 해 연안의 평야 지역인 포메른(Pommern)으로 가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쳐 처음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많은 이교도들의 반발을 사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997년 4월 23일 그다인스크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그의 시신은 볼레슬라프 2세에 의해 그니에즈노(Gniezno)로 옮겨졌다가 1039년에 프라하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슬라브 지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쳐서 슬라브의 사도요 프로이센의 사도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토록 오랫동안”이란 말이 마음에 꽂혔습니다.
두 가지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는 “레오나르도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아직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하고 저에게도 꾸짖으시는 것이
마음으로부터 느껴졌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함께 지냈는데도 모르는 저에 대한
주님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마음으로 느껴졌기 때문인데
달리 표현을 하면 전자는 주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이고,
후자는 주님께 대한 죄송한 마음이지요.
그러면서 다른 한 편 아주 뻔뻔스런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3년을 완전히 같이 먹고 자고, 눈으로 직접 본 제자들도
주님을 잘 모르고 하느님을 잘 모르는데 내가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그렇게 나무랄 것도 아니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을 아는 것은 얼마나 가까이서 봤느냐,
얼마나 오랫동안 봐왔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아무리 오래 같이 있어도 소 닭 보듯이 본다면
그렇게 보는 것은 본 것이 아니고,
그렇게 보면 봐도 알 수 없는 게지요.
그렇습니다.
공간적으로 가까움,
시간적으로 오래됨.
이런 것들은 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 소용없습니다.
반대로 첫눈에 반해 사랑을 하게 되면,
잠깐 만나도 그 사람이 가슴에 강하게 남고,
헤어져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자꾸 생각이 나며,
그가 어떤 사람이고 무얼 하는지 궁금하여 계속 알아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금해야 합니다.
사랑해야지만 궁금하고, 궁금해야지만 알려고 합니다.
궁금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아무 것도 모르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궁금한가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