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4월 24일 다해 부활 제5주일 (성 피델리스 사제 순교자)

dariaofs 2016. 4. 24. 06:28



1578년 10월 독일 슈바벤(Schwaben) 지역의 지크마링겐에서 태어난 성 피델리스는 프라이부르크(Freiburg) 대학교를 마치고 법학박사 과정을 밝으면서 그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이때 그는 스스로 회개생활을 시작했는데, 고행자의 옷을 입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1604년 그는 잠시 귀족 자제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봉직하다가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Alsace) 지방의 아인지스하임(Ensisheim)에서 변호사로 개업하면서부터 그의 인격과 학문이 괄목할 정도로 발전하였고 또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 그는 1612년에 사제품을 받고 그해 10월 4일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피델리스라는 수도명을 얻었다. 그는 사제 서품을 앞두고 자신의 유산을 반으로 나누어서 한 몫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른 한 몫은 신학교를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주교에게 증정하였다.


사제로 서품된 후 그는 주로 설교와 고해성사를 주는 임무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의 인품과 재능을 익히 알고 있던 주교는 스위스 그리존(Grison) 지방의 츠빙글리파(Zwinglian)에게 파견하여 정통 교리를 수호하도록 명하자, 그는 8명의 다른 카푸친 작은 형제회 회원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는데 그가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며칠 밤을 기도하면서 지냈다. 1622년 2월 24일 그루쉬(Grusch)에서 열정적으로 설교한 뒤 한 동안 탈혼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 후 그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사들을 죽여라!'라는 외침을 무시하고 세비스(Sewis)로 돌아와 미사를 봉헌하다가 성난 군중들 앞에 당당히 나아가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다.”는 설교를 하고 군중들의 공격을 받아 1622년 4월 24일 순교하였다.


사건으로 수많은 츠빙글리파 성직자들이 개종하였다. 그는 1729년 3월 12일 시복되었고, 1746년 6월 26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성되었다.



                                             사랑의 의지와 열망이 더 큰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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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 5 주일의 주제는 새로움인 것 같습니다.

복음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고 새 계명을 얘기하고,

묵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얘기합니다.

   

이 두 말씀을 연결시키면 이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셔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다른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새 계명을 받들어 실천할 때 이루어지는 거라는 얘깁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공동체가 바뀌기를 바라고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달리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로서는 다른 새로운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우리가 실제로 살기만 하면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우리가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고 다만 실제로 살지 못할 뿐이지요.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에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로운 계명이었나 봅니다.

이전 계명에는 하느님 사랑하라는 계명만 있고 이웃 사랑 계명은 없거나

하느님의 계명인 율법을 지키느라 이웃 사랑은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제가 알기로 율법에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없지는 않았지요.

율법교사가 모든 계명 중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해 얘기하며 이웃 사랑도 이에 못지않다고 대답하셨지요.

   

그러니 주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보여주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새롭게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새 계명에 대한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있고, 이 말씀을 하시기 전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얘기도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과 같은 사랑을 하는 것,

그것이 새로운 사랑이고 제자들이 실천해야 할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발을 씻어주시면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 못지않은 사랑이라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같다는 말씀도 되고,

이웃을 하느님처럼 받들어 사랑하라는 말씀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이웃이 깨끗한 이웃이 아니라 더러운 이웃,

더러운 곳에 발을 담갔던, 다시 말해서 죄를 많이 지은 이웃이고,

그 발을 씻는 것은 당신의 피로 그 발을 씻는 희생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몸소 보여주신 사랑은

이웃을 하느님처럼 받드는 겸손한 사랑과 더불어

이웃의 죄를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씻어주는 희생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사랑이냐 그것도 문제이지만

그 이전에 사랑하려고 하는 의지와 열망이 더 큰 문제입니다.

   

요즘 저는 젊은 사람 특히 수도자들에게 비판적인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냥 걸어 다니거나 뛰어다니거나 팔굽혀 펴기를 하거나 하면 되지

시간을 일부러 내어 돈까지 들여 스포츠 센터에 가야 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더 신랄한 비판은 돈 들여가며 이 교육, 저 교육 많이 받는 것입니다.

돈 들여 대화법을 배워야 소통을 잘하고, 사랑을 잘할 수 있는 양

교육은 많이 받고, 실컷 받지만 정작 사랑의 의지나 열성은 없어

실제로는 아무런 사랑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마치 나는 사랑하기 위해 이렇게 교육까지 받아가며

애쓰는 거야하며 결국 사랑치 않는 자기를 위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저도 이 일, 저 일을 많이 벌이지만 사랑이 없기에 결국

자기위안과 합리화 차원에서 많은 일을 하는 건 아닌지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