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으로 여겨지는 성 아타나시우스(또는 아타나시오)는 잘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특히 성경과 신학이 뛰어났다. 318년 부제로 서품된 후 자기 고향의 알렉산데르(Alexander) 주교의 비서가 되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단죄했던 325년의 제1차 니케아(Nicaea) 공의회에 알렉산데르 주교를 수행하여 참석하였다. 3년 뒤인 328년 4월 17일 알렉산데르 주교가 사망한 뒤 그 자신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이집트 아리우스파의 심한 반발에 직면하였는데, 이러한 반기는 지중해 제국 전역으로 무섭게 파급되었고, 아리우스를 지원하던 멜레티우스(Meletius) 이단도 덩달아 기세를 올렸다.
물론 이런 세력 뒤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원이 있었다. 그는 335년 독일 남서부 트리어(Trier)로 첫 번째 유배되었다.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고,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서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였다.
새 황제는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도록 허락한 뒤 다음 해에 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의 직위를 복권시켰다. 그러나 성 아타나시우스는 반대파에 의해 2년 후 재차 추방되었다. 이 때 그는 로마(Roma)로 가서 7년 동안 머물러야 했다.
346년부터 356년까지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는 가장 평화로운 황금의 시간이었고 또 그의 주요 저서들도 이때에 나왔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그를 추방키로 하고 군인들을 보냈다.
체포 위험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성 아타나시우스는 이집트의 사막 은수자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으며, 이곳에서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361년에 죽기까지 자기 교구민들을 지도하였다. 그 이후에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두 차례나 유배를 더 당하였고, 366년부터 죽을 때까지는 평화롭게 자기 교회를 다스리고 사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모든 갈등과 폭력으로 인하여 피폐된 교회들을 재건하고, 아픈 상처들을 치료하는데 주력하면서, 저술과 강론을 통하여 위대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는 작은 사람이었으나 아주 강인하고 정신력이 뛰어났다.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파문하기로 결정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하는 데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를 따르는 평신도들도 우왕좌왕하였고, 수많은 주교들도 주저하였다.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성 아타나시우스는 존 헨리 뉴만의 말대로, “그리스도 교회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 전해 온 사도들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도구였다.”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저술한 그의 뛰어난 저술과 연설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저서들을 많이 남겼는데, “안토니우스의 생애”(Vita Antonii)를 비롯하여 성서 주석, 시편 주해 등을 남겼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대 바실리우스(Basilius, 1월 2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9월 13일) 그리고 나지안주스(Nazianzu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1월 2일)와 함께 그리스의 교회학자이자,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유배 중에 저술한 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콘스탄티우스 황제에게 보낸 해명”(Apologia ad Imperatorem Constantium), “수도자들에게 보낸 아리우스주의의 역사”(Historia Arianorum ad Monachos) 등이 있다. 성 아타나시우스가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을 직접 기록하지는 않았다.
강론 : (요한 15,26-16,4ㄱ.)
<나를 증언하여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27)."
이 말씀 바로
앞에는
제자들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고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더라도
굴하지 말고 신앙을 증언하여라."
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보호자, 진리의 영'은
'성령'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보호자'이고,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에 '진리의 영'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이라는 말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증언할 때 도와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능동적으로 증언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성령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라는 명령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고,
증언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하는 증언과
제자들 자신들이 하는 증언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제자들이 능동적으로 증언하려고 노력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또는 성령의 도움을 믿고
능동적으로 증언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증언'은 오늘날의
신앙인들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신앙생활은 일차적으로는 자기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일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삶'으로
믿음을 증언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말씀과
마태오복음 28장 20절의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은 모순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앙인들과 언제나 항상 함께 계신다면
성령을 안 보내셔도 되는 것 아닌가? 왜 꼭 성령을 보내셔야
하는가?")
"왜?" 라고 묻는다면, 그 답은 "모른다."이지만,
예수님께서 '성령의 활동 안에서 현존하신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뵙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요한 14,9) 적용하면,
"우리가 성령의 활동을
체험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1-4ㄱ)."
이 말씀도 박해 예고
말씀인데,
박해를 받더라도 믿음을 잃지 말라는 격려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이라는 말씀에서 '이
말'은,
제자들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요한 15,18-25) 가리킵니다.
'떨어져 나가다.' 라는 말은
'신앙을 버리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박해를 예고한 것은
너희가 신앙을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박해를 미리
예고하신 것은
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기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은 박해를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이미
예고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고(4절),
그 기억은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라는 말은, 박해가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뜻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박해를 허락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것을 "모든 일은
하느님의 손바닥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알고 계시니,
그
박해에 대한 대비도 미리 하셨을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우리는 육신의 목숨을 빼앗기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잃는 일은
없도록
끝까지(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라는 말씀은
유대교 박해의 성격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신념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한 일입니다(3절).
박해자들이 자기들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선과 악을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박해도 죄가 되지만, 선악을 마음대로 정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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