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5월 12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성네레오와 성 아킬레오 순교자 성 판그라시오 순교자)

dariaofs 2016. 5. 12. 05:21



성 네레우스(또는 네레오)와 성 아킬레우스(Achille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순교자로서 생몰 연대는 불분명하다.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원래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로마 황제의 친위대 소속 군인이었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Damasus I, 12월 11일)가 4세기 말에 쓴 그들의 무덤 묘비에 따르면, 그들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손녀이며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Flavia Domitilla)를 죽이라고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받아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자신들이 받은 명령을 거부하였다.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이를 ‘신앙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였다.

결국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와 함께 로마(Roma)에서 폰자(Ponza)라는 섬으로 추방되었다. 이 세 사람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테라치나(Terracina)라는 섬으로 옮겨졌다.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는 그들의 추방 자체가 하나의 긴 순교록이라고 하였다. 이 섬으로 유배된 후에 성녀 플라비아 도미틸라는 화형을, 그리고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는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들의 유해는 아르데아티나(Ardeatina) 가도에 있는 도미틸라의 묘에 안치되었다. 그들은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공경되어 그 이름이 5세기 로마의 축일표에 기재되었고, 젤라시우스 전례서(Sacramentarium Gelasianum)에는 그들의 축일 미사 전례문이 수록되어 있다.


398년 교황 성 시리키우스(Siricius, 11월 26일)는 그들을 기념하여 성녀 도미틸라의 묘에 성당을 세웠고, 이 성당에서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 교황은 재임 중 그들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강론을 하였다. “이 성인들은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발아래 놓았습니다.” 800년에 교황 성 레오 3세(Leo III, 6월 12일)는 그들을 기념하여 새 성당을 지었으며, 이 성당은 16세기에 바로니우스(Baronius) 추기경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성 판크라시오



시리아(Syria) 또는 프리지아(Phrygia) 태생인 듯한 성 판크라티우스(Pancratius, 또는 판크라시오)는 일찍이 양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어 삼촌인 성 디오니시우스(Dionysius)와 함께 로마로 와서 살았다. 그는 여기서 삼촌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 이때 불과 14세의 나이였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14세의 어린 나이로 고문을 당하고 로마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아우렐리아(Aurelia) 가도에 있는 옥타빌라(Octavilla) 묘지에 안장되었다.

성 판크라티우스는 특별히 영국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캔터베리(Canterbury)의 주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5월 27일)가 그의 첫 번째 성당을 성 판크라티우스에게 봉헌하고 성인의 유해를 모셨기 때문이다.


그는 중세 후기 14명의 수호성인들 중 1명으로 여겨졌으며, 신생 국가와 청춘 남녀들의 보호자이자 병자들의 협조자로서 공경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로마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여러 교회에 나뉘어 보관되고 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나도 바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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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복음을 보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일지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바라시는 게 없었을 거라는 거였습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버지께도 바라시는 것이 없었을 것이고,

우리에게는 더더욱 바라시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셔서 뭣을 바라시지 않고,

바라시는 것은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욕심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 주님의 기도를 보면 4가지입니다.

-알게 되는 것.

-보게 되는 것

-주님 안에 머무는 것.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되는 것.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게 되기를 바라시는데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듯 우리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중충하던 날씨가 계속되다 마침 소풍가기로 한 날 해가 반짝 떠오를 때

그 햇빛과 화창한 날씨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데

그것이 우연이나 자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면

우리는 거기서 얼마나 큰 사랑을 느끼게 됩니까?

 


그러니 날씨가 아니라 우리 주님을 하느님께서 주셨고,

그것도 나에게 주셨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얼마나 크게 느끼겠습니까?

그리고 주님뿐 아니라 나에게 주신 모든 것,

내 부모, 내 자녀, 내 형제, 내 친구, 내 직장 동료가 모두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사람들이고 사랑으로 주신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는 사랑에 겨울 것이고 너무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것도 지나고 난 뒤나 죽고 난 뒤에 아는 게 아니라 현재적으로 안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느낄 것이니 더 행복할 겁니다.

 


다음은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기도하시지요.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아는 것은 관념적으로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알게 됨으로써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으로 발전을 해야 되는데

알게 됨으로써 느끼는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이 관상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런 행복을 일컬어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고 하지요.

 


우리에게 보내신 주님이 사랑의 표시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벅찬데

그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그 영광을 우리가 직접 보게 되면

그 벅참은 타볼 산의 베드로처럼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사실 주님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임을 우리가 알고

그 영광을 우리가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다면 우리가 다른 것을 보거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당연히 하느님 안에 머물 것입니다.

타볼 산의 베드로처럼 여기서 텐트치고 영원히 머물겠다고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으면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자동일 터인데

아무튼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지금 우리도 바랍니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