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펠릭스는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Abruzzo) 북서부의 치타두칼레(Cittaducale) 교구에 속한 칸탈리체에서 1515년 5월 18일, 신앙심 깊은 농부인 산티 포리(Santi Porri)와 산타 포리(Santa Porri) 부분의 네 아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아홉 살 때부터 남의 집에 들어가서 28세가 될 때까지 농부와 목동으로 생활하면서, 특히 양을 돌보는 시간을 기도로 보냈다. 성장한 뒤에도 그는 일하면서 기도하는 등 매우 높은 차원의 관상 기도를 하였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지낼 정도였다.
그러던 중 한 동료가 사막 교부들의 삶에 관한 책을 읽어 주었을 때 그는 그들을 따르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를 신청하여 1543년에 안티콜리(Anticoli)에 있는 로마 관구의 수련소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련기 때부터 그는 이미 가난과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수련장에게 간청하여 보속과 금욕을 배로 늘렸다.
그리고 동료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칸탈리체의 어린이들도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불렀다. 1544년 5월 18일 그는 몬테 산 조반니(Monte San Giovanni) 수도원에서 장엄 서약을 하였다. 그 후 3년 동안 티볼리(Tivoli)와 비테르보(Viterbo)에서 영적 교육을 더 받은 뒤 1547년 로마의 성 보나벤투라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이후 40년 동안 탁발 수사로 그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이의 고통을 대속하는 사람"이라며 늘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성 펠릭스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하느님께 감사"를 연발하고 또 실제로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72세의 일기로 1587년 5월 18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 펠릭스는 1625년 10월 1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712년 5월 22일 교황 클레멘스 11세(Clemens X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화에서 그는 흔히 팔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성모 마리아가 그에게 나타나 아기 예수를 팔에 안겨 주는 환시를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태생인 성 요한은(Joannes)은 로마(Roma)에서 부제가 되었다가 523년 8월 13일에 교황 성 호르미스다(Hormisdas, 8월 6일)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동로마 제국 황제였던 유스티누스 1세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하여 이단 척결을 앞세워 박해하자, 아리우스주의자이면서 동고트족(Ostrogoths)과 이탈리아의 왕인 테오도리쿠스(Theodoricus)가 교황 요한 1세(Joannes I)에게 도움을 청했다.
즉, 그에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유스티누스 1세를 직접 찾아가 아리우스주의자들의 건물 압수와 강제 개종을 통한 박해를 중단해 줄 것을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525년에 교황으로는 최초로 동로마 제국에 도착한 교황 요한 1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 당시 서로마 제국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다.
교황 요한 1세와 유스티누스 1세의 만남은 서로마 제국의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교회 간의 유대감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재통일을 꿈꾸는 황제와의 관계가 한층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협상 결과가 만족스러웠지만 강제로 개종한 사람들이 다시 아리우스주의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교황 요한 1세가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는 526년 4월 19일 콘스탄티노플의 성녀 소피아 대성전에서 부활 대축일 미사를 통해 로마 교회의 전례를 거행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교구와 에피파니우스 교구에 대한 수위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이것은 교황의 수위권과 관련하여 가톨릭 교회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일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테오도리쿠스는 이미 위대한 철학자 보에티우스를 처형시켰으며, 귀향하는 교황 요한 1세를 체포하여 자신의 왕국 수도인 라벤나(Ravenna)의 감옥에 가두었다.
이 감옥에서 교황 요한 1세는 526년 5월 18일 사망하였다. "로마 순교록"은 교황 성 요한 1세를 순교자로 언급하고 있다.
"라벤나 출신의 교황이자 순교자인 성 요한 1세는 정통적인 신앙 때문에 아리우스주의자인 이탈리아의 왕 테오도리쿠스에 의해 라벤나로 호출되어 투옥되고 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강론 :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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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whoever is not against us is for us."
♣ 관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
예수님의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본 요한이 그것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9,38). 그러자 그분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9,39)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인간적인 옹졸함에서부터 벗어나 외부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관대함과 열린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문이 없는 자기들만의 모임이나 만남이라면, 그것은 복음적 생명이 넘치는 공동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복음적인 사람은 끼리끼리만 뭉치고 만나는 옹졸함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넘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좋은 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선으로 보아 함께 기뻐하고 감사드릴 줄 아는 너그러움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소유 의식에 뿌리를 둔 질투에서 해방되려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하겠지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비교할 때 열등의식에 빠지기 쉬우며, 열등의식은 삶을 폐쇄적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밖의 존재를 통하여 자기를 실현해 나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인간이 만들어놓은 규범이나 자신의 경험과 사고방식, 여러 가지 조건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구속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이런 자유스러움 안에 참 사랑도 꽃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내의 어떤 직책을 맡았느냐, 누가 더 봉사활동을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이에게 물 한잔이라도 주는 숨은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상기할 일입니다. 그릇된 선민의식, 엘리트의식을 버려야겠지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열어주며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버팀목이 되어주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넓고 관대하고 겸손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열린 마음으로 주님 오실 빈 그릇을 봉헌해 드렸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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