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5월20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제) - 원망은 불행타령.

dariaofs 2016. 5. 20. 05:15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또는 베르나르디노)는 1380년 9월 8일 이탈리아 시에나 근방 마사 마리티마(Massa Marittima)에서 정치가였던 아버지 톨로 델리 알비체스키(Tollo degli Albizzeschi)와 어머니 네라 델리 아베두티(Nera degli Avveduti)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다시 3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고 고아가 되어 친척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1391부터 1397년까지 시에나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그곳 대학에서 3년 간 교회법을 배운 그는 라틴어 고전뿐만 아니라 성경과 신학에도 심취하였고 신심의 실천에도 열의를 보였다.

1400년 흑사병으로 온 나라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을 때, 그는 약 4개월 동안 시에나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 병원에서 흑사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1402년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이듬해 9월 8일 콜룸바요 수도원에서 허원을 하였고, 1404년에 사제품을 받고 다음해에 세지아노(Seggiano)에서 설교를 시작한 이래 죽기까지 설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성 베르나르디누스는 1408년부터 다음해까지 페라라(Ferrara)에서, 1410년에는 시에나와 파비아(Pavia)에서 설교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예수 성명에 대한 설교를 시작함으로써 롬바르디아(Lombardia) 지역의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1417년부터 그는 밀라노(Milano)에서 대중 설교가로서 활동하면서 뛰어난 웅변술과 정열적인 설교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걸어서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 지방을 순회하며 정열적으로 설교하였는데, 그의 주된 설교 주제는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과 참회와 사랑의 실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도박, 고리대금업, 마술, 미신 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한편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권력 투쟁을 그 시대의 근본적인 악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특별히 예수 성명의 신심을 전파했는데, 이 신심은 교회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그 신심의 깊은 신학적 기초를 깨닫도록 그리스어 예수(ΙΗΣΟΥΣ)의 첫 세 글자를 로마자로 표시한 ‘IHS’를 고안하였다.


그가 만들어 낸 이 모노그람마(Monogramma)는 ‘이 표징 안에서’(in hoc signo),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표징으로’ 혹은 ‘인간의 구원자 예수’(Jesus hominum Salvator)라는 뜻이다. 그는 빛나는 태양의 중앙에 이 글자를 새긴 문장을 사용하여 설교를 마무리할 때마다 공경 예절을 행하였다.


그는 이 문장으로 어떤 미신적인 상징이나 특정 파벌의 훈장 등을 대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예수의 성명을 성경의 요약이요 일치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성 베르나르디누스와 그의 제자들의 사도직을 통해서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은 널리 확산되었고, 이 문장은 교회와 가정, 공적인 건물 등에도 사용되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일부 인문주의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그의 활동을 불신하고, 이 기도를 위험한 혁신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1424년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예수 성명 신심에 대한 공식적인 반발이 시작되었다.


무려 8년 동안 그는 교도권과 신학계로부터 숱한 고발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1432년 1월 7일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의 칙서 “아포스톨리케 세디스”(Apostolicae Sedis)를 통해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그의 활동이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 교황으로부터 시에나의 주교로 임명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설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1430년부터 12년 동안 프란치스코회 엄률회의 총대리로 활동하면서 프란치스코회의 보다 엄격한 규칙을 회복하자는 수도회 내부의 개혁 운동에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439년에는 피렌체(Firenze) 공의회에 참석하여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444년 고향에서 설교를 마친 후 그는 고령의 나이와 쇠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나폴리(Napoli) 왕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출발하였으나, 아브르초(Abruzzo)의 라퀼라(L'Aquila) 부근에서 열병에 걸려 라퀼라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머무르다가 그곳에서 5월 20일 사망하여 그곳 성당에 묻혔다.


그의 문장은 IHS가 새겨진 평판(平板) 혹은 태양이고, 광고업자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1450년 5월 24일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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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어쨌거나 원망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원망이란 불행한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좋은 것이 아니고,

원망을 해봤자 나아지는 것 하나도 없기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원망이란 자기 불행이 자기 탓이 아니라 남 탓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이 남 탓이라면 행복도 남 덕이고

나의 행복이 남의 손에 달렸다고 얘기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원망을 할 때마다.

 


아무튼 원망을 한다는 것은 불행타령이고,

그것도 남 탓을 하는 불행타령이며,

나의 행복이 남의 손에 있다는 노예의 불행타령입니다.

 


원망이란 이런 것이니 원망을 해봤자 나아지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원망을 하였으면 내일도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로 인해 불행했으면 앞으로도 너로 인해 불행할 것이고,

지금까지 나의 행복이 너의 손에 있었다면 앞으로 그러할 것입니다.

 


이것이 원망의 철학이고 윤리학입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이런 차원을 넘어섭니다.

원망의 신학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원망을 하면 심판자 주님께서 심판하실 거라고 얘기하니 말입니다.

 


우리의 원망은 서로 간의 원망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의 개입을 초래하고 주님의 심판을 초래한다는 얘깁니다.

애들 싸움에 어른이 개입하는 형국인 것입니다.

 


권투 경기에 심판이 서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원망을 할 때 주님께서 심판을 보신다는 얘깁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보시니 그 심판은 틀림없이 공정하겠지만

주님의 심판은 우리의 원망이 이유 없다고 하실 것이고,

원망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행복하라고 만드셨고

원망치 말라 하셨는데 원망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담에게 하와를 주실 때 외롭지 않도록 주셨고,

동반자와 서로를 이끌어주는 존재로 주셨는데

죄의 탓을 하와에게 한 아담에게 벌을 주셨듯이

불행하다고나 하고

그 불행이 남 탓이라고 하는 우리도 벌주실 것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