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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문화와영성] (23) 되찾은 아들의 비유-1 - 송창현 신부

dariaofs 2017. 1. 17. 06:05

성경, 문화와 영성 (23)
되찾은 아들의 비유
- 1


송창현(미카엘)|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는 질문한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새로운 삶의 방식인 에토스(ethos)를 제시하신다.


예수님의 에토스가 잘 표현되는 자리 중의 하나가 바로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이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고 잘 알려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비유는 많은 예술작품들의 소재가 되었고, 성경학계에서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우리는 학자들의 해석과 더불어 렘브란트의 걸작을 함께 감상하고자 한다.




■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내용


· 루카 15장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세 비유는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상황을 그 배경으로 한다. 그 상황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를 비판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연속적으로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세 번째 비유에는 아버지, 큰아들 그리고 작은 아들이 등장한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이며, 아버지 없는 자신의 삶을 원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멀어진다.


아버지의 재산 중에 자신의 몫을 챙겨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무책임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낭비한다.


그는 곤궁에 허덕이다가 아버지를 떠난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경험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아 결국 아버지께로 다시 되돌아온다.


· 작은 아들이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아버지는 그를 보고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루카 15,20).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19)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기를 원하는 작은 아들을 아버지는 따뜻하게 맞이하여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고 잔치를 벌인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분리하고 배제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였다.”


자신을 떠났던 작은 아들, 다시 돌아와 종이 되려는 그를 아버지는 다시 아들로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올바른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고 공동체를 다시 형성한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뿐 아니라 자신과 큰 아들의 공동체, 그리고 이 두 형제의 공동체도 회복시킨다.

 

■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 렘브란트는 예수님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되돌아온 작은 아들을 아버지가 품에 안고 있는 장면을 탁월한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은 1662~1669년 사이 혹은 1667년경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262×205cm의 크기이며,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Hermitage)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이 그림의 제작 연도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다. 정확한 연대 추정은 불가능할지라도 <탕자의 귀환>은 렘브란트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 그림의 중심인물은 아버지, 작은 아들, 큰 아들이다. 붉은 망토의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안고 있고, 오른쪽의 큰 아들은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는 렘브란트의 가장 큰 특징인 빛과 어둠의 대조가 뚜렷하다.


그림의 왼쪽에는 아버지와 작은 아들의 만남이 빛 속에 묘사되고, 그림의 오른쪽에 서 있는 큰 아들은 어둠 속에 있다.


이들 사이에 검은 모자를 쓴 콧수염이 있는 어떤 남자가 앉아 있고, 이들 뒤편에 두 여인이 등장한다. 기둥 뒤에 한 여인이 있고, 그림의 맨 왼쪽 뒤편에 다른 여인이 희미하게 묘사된다.

 

■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명칭


· 루카 15,11-32의 본문은 읽기의 초점을 등장인물인 아버지, 큰 아들, 작은 아들 중에서 누구에게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우리 본문은 “탕자의 비유”로 불린다.


그러나 이 명칭은 우리 비유 전반부의 앞부분을 적절하게 잘 표현하지만, 전반부의 뒷부분과 후반부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작은 아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탓에 아버지와 큰 아들은 관심 밖에 있다. 이와 유사한 명칭인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도 작은 아들이 관심의 중심에 있다. 한편 “성경”의 명칭인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비유 전반부의 뒷부분을 잘 표현하지만 앞부분을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 성경학계에서는 우리 비유에서 아버지의 특성과 역할에 주목하는 연구 경향들이 있다. 즉 아버지를 이 비유의 중심인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대변하는 비유의 명칭으로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 등이 있다.


또한 아버지의 역할과 함께 두 아들을 모두 잃어버린 아들로 표현하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는 명칭도 있다.


그리고 이 비유의 중요 등장인물과 그 관계를 잘 표현하고 비유의 내용을 중립적으로 묘사하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라는 명칭도 사용된다.

 

■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구조


· 이 비유의 중요 등장인물인 아버지, 큰 아들, 작은 아들에 따라 본문의 구조를 나눌 수 있다. 11-24절의 중심 등장인물은 작은 아들이고 25-32절의 중심은 큰 아들이다.


 따라서 우리 본문은 중심인물에 따라 11-24절과 25-32절의 두 부분으로, 즉 전반부와 후반부로 그 구조를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문학적 구조에서 지적할 점은 각 부분의 끝이 아버지의 말로 마무리 된다는 것이다.


전반부의 끝인 22-24절(“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과 후반부의 끝인 31-32절(“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은 작은 아들, 잔치, 기쁨에 대한 아버지의 언급이다.

· 본문의 문학적 구조를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나누는 제안들 중에는 다른 방식도 있다. 아버지, 작은 아들, 큰 아들이라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좀 더 세분한 구조인 셈이다.


11-12절은 전체 비유의 도입 부분이다. 첫째 부분(13-20ㄱ절)은 작은 아들, 둘째 부분(20ㄴ-24절)은 아버지와 작은 아들, 셋째 부분(25-28ㄱ절)은 큰 아들, 넷째 부분(28ㄴ-32)은 아버지와 큰 아들이 중심이다.


 

* 송창현 신부는 1991년 사제수품 후 로마성서대학원에서 성서학 석사학위(S.S.L.)를, 예루살렘 성서·고고학연구소에서 성서학박사학위(S.S.D.)를 취득,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성서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