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립 드 샹파뉴 작 ‘최후의 만찬’, 1652,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가톨릭 굿뉴스 제공 |
예수님이 수난 전에 제자들과 함께했던 마지막 만찬은 단순한 저녁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것은 ‘성찬례’입니다.
성찬례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공관 복음뿐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도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편지인 코린토 신자들에 보낸 첫째 서간에서도 언급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성찬례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이후에 전해지는 예수님의 가르침,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은 공관 복음에서 전하는 최후의 만찬의 성찬례를 대체하는 부분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이 표현은 성찬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최후의 만찬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한복음 6장은 성찬례가 갖는 중요한 의미를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전해줍니다.
공관 복음과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긴 말씀은 성찬 제정문이 되어 지금 우리가 바치는 미사에서도 그대로 사용됩니다.
이 최후의 만찬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기억이고 그것을 우리는 지금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삶에서 성찬례는 가장 정점에 있습니다. 성찬례를 담고 있는 미사는 최고의 공적인 기도이자 교회와 신앙인들이 살아가게 하는 양식을 제공하는 장(場)이기도 합니다.
성찬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전하는 것은 바오로 사도의 편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당시의 성찬례에 대한 흔적과 함께 성찬 제정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초기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했던 방식을 성찬을 거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그것을 후대에 전해주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공동체의 문제를 이렇게 지적합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1코린 11,20)
성찬을 위해 모이지만 어떤 이들은 배고픔에 먼저 식사를 하고 또 모임에 늦는 이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비판합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찬이 가진 의미입니다. 성찬은 교회의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함께 모여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반하는 부당한 행동들은 오히려 심판을 가져올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경고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9)
성찬 제정을 전하는 공관 복음과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의 구체적인 표현은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빵을 예수님의 몸으로, 그리고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나타내며 이것을 통해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전하는 이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기억하여 행하라”는 사실입니다. 기억과 행함은 최후의 만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말씀에서 교회는 초세기부터 지금까지 성찬례를 모든 전례와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둡니다. 다른 의미에서 교회가 지닌 본연의 사명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것을 성찬을 통해 지속해서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6)
기억과 재현. 이 둘은 성찬례를 특징짓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고, 이 기억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가장 탁월한 방식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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