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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34.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요한 15,1)

dariaofs 2017. 2. 2. 19:01




▲ 정미연 작 ‘참포도나무의 예수님’, 2015. 가톨릭굿뉴스 제공


요한복음은 14장부터 17장까지 상당히 긴 예수님의 담화를 전합니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흔히 ‘고별 담화’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 이전에,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공관 복음은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을 짧게 전하는 반면에 요한은 성령과 세상 그리고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긴 담화를 소개합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 15장 1-17절은 포도나무의 표상을 통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넓은 의미의 제자들에게 권고하는 예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머물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요한복음의 이 표현은 ‘믿음’을 대신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상당히 정적(靜的) 표현이지만 요한에게서 이 표현은 예수님과 맺는 관계의 역동성을 나타냅니다.


단순히 머물러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머무는,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현존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요한은 ‘믿음’보다 더 역동적이면서 생생함을 전하는 의미로 ‘머무름’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포도나무는 성경에서 하느님과 그의 백성들, 곧 믿는 이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표상입니다. 가지가 나무 없이 살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지에 양분이 공급되고 그것을 통해 열매를 맺는 것은 나무에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자연적인 현상들은 예수님과 믿는 이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적용됩니다. 포도나무가 그러하듯 예수님과 믿는 이들의 관계는 유기적입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양분을 공급받으며 열매를 맺기 위해 필수적인 모습입니다. 가지는 살아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나무로부터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믿음 안에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단지 외형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역동성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열매 맺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있을 때 가능합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 있다는 것은, 예수님 역시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다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또한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요한복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시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형제적인 이웃 사랑의 근거가 됩니다.(요한 3,16)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의 의미는 공관 복음에서 표현하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마르 12,28-34) 요한은 이것을 포도나무의 표상을 통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담화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도나무를 통한 말씀은 한 개인을 향한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향한 가르침입니다. 공동체의 가장 큰 특성은 사랑입니다.


공동체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 지속됩니다. 이 모든 사랑의 근원은 하느님입니다. 믿음은 수직적으로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면서 수평적으로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