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분열 이전 이스라엘 제전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민족의 자부심이며 영적 구심점이었다. 남북으로 갈라진 뒤에도 북쪽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남쪽 성전에서 제사를 봉헌하곤 했다. 북쪽 지도자들에게는 정치적 부담이었다.
예로보암이 베텔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든 뒤 절하게 했던 진짜 이유다. 전통신앙 대신 토착 신앙을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우상숭배였다. 사제들이 반발하자 자신의 지지자를 사제로 임명했다.
레위 지파가 아닌데도 임명했다(1열왕 12,31).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는 율법도 무시했던 것이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 그의 가문이 몰락하게 되는 이유다.
예로보암이 죽자 아들 나답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2년 뒤 살해됨으로 예로보암 왕가는 사라지고 만다. 왕권을 가로챈 이는 바아사Baasha였다(1열왕 15,28). 이사카르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 장수였다.
당시 나납은 필리스티아인 도시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중이었다. 전쟁터에서 군 지휘관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인 것이다. 권력을 잡은 바아사는 예로보암 일족을 몰살시킨다. 열왕기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했다(1열왕 15,29).
바아사는 24년간 통치했지만 금송아지를 철거하지 않았다. 그 역시 백성들이 남쪽으로 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정통신앙은 위협받고 있었다. 바아사는 ‘바알은 태양이다.’라는 뜻이다.
북쪽이 우상숭배에 빠져들자 남쪽으로 이주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정통신앙 수호자들이 가족과 함께 북쪽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아사는 이탈을 막고자 남쪽 경계선에 성곽도시 건설을 시도한다.
라마Lama였다(1열왕 15,17). 남쪽 임금 아사Asa는 외교전으로 맞섰다. 다마스쿠스의 임금 벤 하닷에게 북쪽공격을 충동질한 것이다. 성공을 위해 성전과 왕실의 보물 수천 점을 바쳤다(1열왕 15,19).
벤 하닷이 북쪽 몇몇 도시를 공격하자 바아사는 라마를 세우다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남쪽 임금 아사는 두고 간 성곽자재를 거두어 국경지대 게바와 미츠파 도시를 보강하는데 사용했다(1열왕 15,22).
남쪽은 아비얌과 아사 왕으로 이어지는 안정기였다. 하지만 북쪽은 쿠데타로 집권한 바아사가 우상숭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차에 아사 왕은 다마스쿠스의 벤 하닷을 끌어들여 북쪽을 제압했던 것이다.
남쪽 아사가 41년간 왕으로 있는 동안 북쪽은 6명의 왕이 바뀌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우상숭배의 보속이었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마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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