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앙 돋 보 기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21. 약한 이들(병자들)의 형제공동체

dariaofs 2020. 12. 21. 01:22

‘반대의 일치’ 실현하시는 그리스도께 희망 두어야

 

▲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무한하심, 세상의 무질서와 하느님의 거룩함, 가로와 세로가 합쳐지고 조화를 이루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곳,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위치하는 곳이다. 프란치스코회의 제2 창립자로 불리는 보나벤투라 성인은 반대의 일치를 이루는 그리스도께 희망을 둘 것을 강조했다. 그림은 보나벤투라 성인 초상화.


보나벤투라는 「he Triple Way(삼중도)」라는 책에서 중세의 전통적인 기도의 3단계-정화기, 조명기, 완성기(혹은 일치기)-를 이용해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해서 말하는데 특별히 정화기에서 우리 죄의 성찰을 언급하면서 죄의 종류들을 나열한다. 그중에서 뜻밖의 죄 목록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무질서와 죄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이 무질서 속에서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내심 깊은 믿음이 필요한 것이고, 이런 과정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으로 죄 많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켜 주신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아마 우리가 급히도 변화되어 가고 ‘빨리빨리’를 선호하는 삶을 살아가며 아쉽게도 너무도 힘들고 더욱더 신경증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갖추어지고 조건 지어져야 한다는 강박증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가 삶을 더 살면 살수록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세상과 이 사회의 모습, 내 공동체의 모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상황 설정이 맞추어지지도 않고,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만 형성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모든 것이 질서 지어져 있어서 그 모든 것이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과학 이론이 주를 이루었던 현대주의 세계관과는 달리 현대주의 이후(post-modern)의 과학에서는 무질서와 불규칙을 계속해서 더 발견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요 우주인 것이다. 보나벤투라는 이런 우주를 십자가에 비유하며 ‘반대의 일치(coincidence of opposites)’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데 이 반대의 일치를 실현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의 한계와 하느님의 무한하심, 세상의 무질서와 하느님의 거룩함, 가로와 세로가 합쳐지고 조화를 이루는 곳이 바로 십자가의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곳,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위치하는 곳이다.

20세기 초 스페인의 철학자 미구엘 데 우나무노는 그래서 우리 인간의 이런 삶의 모습을 두고 ‘삶의 비극적 의미’라는 말로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분명히도 인생은 그렇게 내 마음대로 움직여가지도 않고 내가 바라는 대로 아름다운 것만 내 삶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성경의 세계관과 고대 신화들과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인간이 주도하지 않고 신화적인 것을 받아들이던 때의 인간들은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 속에 살았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것, 즉 삶에 주어진 자연스러운 불편함을 받아들이기를 너무도 싫어하는 정신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심지어 우리는 더러운 것마저도 끌어안아야 할 때가 있다. 온 세상은 깨끗하게만, 혹은 질서정연하게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질서가 있으면 무질서가 있고, 깨끗함이 있으면 더러움도 있는 것이며, 행복이 있으면 불행도 있는 것이고, 웃음이 있으면 울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코헬렛」의 저자는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자연스럽고 행복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주장한 파시즘(fascism)은 이런 종류의 어리석은 우리 인간의 정신세계를 잘 드러내 준다. 본래 이 말은 ‘다발’ 혹은 ‘묶음’을 의미하는 파쇼(fascio)에서 유래하는 말로서, 모든 것이 획일화한(모든 것이 같은 정신 아래 흐트러지지 않는 질서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현대 세계에서 파시스트라고 일컬어지는 무리는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 정신세계는 그런 질서정연함만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파시스트의 모습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이런 상황을 그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상책일까? 그렇지 않다. 이런 상황을 아무런 대책 없이, 절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선으로 모으는 절대적인 ‘그 무엇’, 혹은 ‘그 누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정신 자세가 꼭 필요하다.

 

이는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찾고자 했던 ‘통일된 영역(unified-field, 통일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무질서가 절대적으로 극복되는 영역 혹은 어떤 인격체(Persona)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이런 무질서 안에서도 확신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희망’의 의미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내일 혹은 앞으로 잘 될 거야’ 식으로 막연한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써 그 희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계속>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