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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8) 이스라엘 두 왕국으로 갈라지다

dariaofs 2023. 4. 21. 00:18

이스라엘, 나라는 분열되고 우상숭배 성행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사망한 후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진다. ‘프라고나르,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있는 예로보암’, 1752년, 아카데미 데 보자르, 파리, 프랑스.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

기원전 933년께 솔로몬이 죽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군합국’(君合國)이었습니다. 군합국은 최고 권력인 한 임금 아래에 둘 이상의 왕국이 결합해 이루어진 나라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남북의 지파가 합해져 이뤄진 왕국이었습니다. 남쪽 지파는 유다와 벤야민 지파를 말합니다. 북쪽 지파는 나머지 열 지파를 일컫습니다.

 

다윗이 먼저 유다 지파의 왕으로 선출된 다음 북쪽 지파 원로들이 다윗과 계약을 맺으면서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2사무 5,1-5) 이처럼 누군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려면 먼저 남북으로 양립된 열두 지파의 지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 출신인 르하브암은 북쪽 지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스켐에서 지파 원로들을 소집합니다. 이 자리에서 북쪽 지파 원로들은 르하브암에게 솔로몬 치하의 과중한 공물 징수와 강제 노역을 감해 달라고 청합니다.

 

르하브암은 이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북쪽 지파 원로들은 르하브암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고 느봇의 아들 예로보암을 자신들의 왕으로 선포합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집니다.(1열왕 12장 참조)

 

유다와 이스라엘 두 왕국은 사해 북쪽 벳 아라바에서 유다 광야의 와디 엘 켈트와 와디 수웨이니트의 서쪽 산악 지역, 게바 북쪽과 벳 호론 남쪽, 아얄론 북쪽 필리스티아인의 영토를 경계로 분열됐습니다.

르하브암

르하브암은 41살에 즉위해 기원전 913년까지 유다를 다스립니다. 그는 북쪽 지파들이 자신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자 군사 18만 명을 동원해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스마야 예언자가 르하브암에게 “동족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1열왕 12,22-24; 2역대 11,1-4) 다행히 르하브암은 스마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예루살렘에 살면서 베들레헴과 헤브론 등 유다와 벤야민 지파 땅 15곳에 요새를 짓고 군대를 배치합니다.(2역대 11,5-12)

르하브암의 어머니는 암몬 출신 나아마였습니다. 이교인이었죠.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르하브암은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곳곳에 산당을 지어 아세라 목상을 세워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하게 했고, 신전 남창들이 그곳을 지키게 했습니다. 성경은 르하브암이 주님의 율법을 저버리고 하느님을 배신하였다고 비난합니다.(2역대 12,1-2)

 

그 결과 르하브암 재위 5년 때 이집트 파라오 시삭이 유다를 침략해 예루살렘을 약탈했습니다. 주님의 집은 물론 왕궁이 모조리 털렸습니다.(2역대 12장 참조) 르하브암은 기원전 913년께 사망합니다.

예로보암

북 왕국 이스라엘의 태조인 예로보암은 에프라임 지파 출신입니다. 예로보암은 우리말로 ‘백성은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실로 출신 아히야 예언자는 예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이라면서 다윗처럼 하느님의 명령하는 바를 모두 귀담아듣고, 주님의 길을 걸으며 하느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고, 주님의 규정과 계명을 지키는 임금이 되라고 당부했습니다.(1열왕 11,38 참조)

하지만 예로보암은 왕위에 오르자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예로보암은 베텔과 단에 예루살렘 성전을 대치하는 이스라엘 왕국의 성소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는 성소에다 금송아지를 두고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신다”면서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레위인이 아닌 자들을 사제로 임명해 자기가 마음대로 정한 축제일에 금송아지에게 제물을 바치게 했습니다.(1열왕 12,28-32)

 

예로보암이 이 같은 짓을 한 이유는 축제 때마다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버리고 유다 임금인 르하브암을 따르지 않을까 불안했기 때문입니다.(1열왕 12,26-27)

이 일로 예로보암 집안에는 하느님의 무자비한 재앙이 내려집니다. 하느님께서 예로보암에 속한 모든 사내를 치셨습니다.

 

성 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새가 쪼아 먹을 만큼 예로보암의 집안에 속한 이는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1열왕 14장 참조) 예로보암은 이스라엘을 22년간 통치하다 기원전 910년께 사망했습니다.

르하브암과 예로보암 중 누가 이스라엘 왕국 분열에 대한 책임이 더 클까요? 시기에 따라 평가가 달라집니다.

 

기원전 550년께 쓰인 신명기계 역사서 가운데 열왕기는 르하브암을 별로 탓하지 않고 오히려 예로보암을 비난합니다.

 

그 이유는 예로보암이 베텔과 단에 성소를 짓고 금송아지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숭배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기원전 180년대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하는 집회서는 르하브암과 예로보암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르하브암은 백성 가운데 우둔하고 지각없는 자로서 그의 정책 때문에 백성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도 이스라엘을 범죄로 이끌었고 에프라임에게 죄악의 길을 걷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악이 무척 불어나서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온갖 악을 따르다가 마침내 자신들에게 징벌을 불러들였다.”(47,23-25) 집회서는 르하브암이 스켐 회의에서 백성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줬으면 솔로몬 통치 기간에 생겨난 불만들을 해소해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합니다.

 

집회서는 르하브암이 무지하지 않았다만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은 없었을 것이라고 탓합니다.

리길재 기자(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