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7,36-8,3)
<용서, 사랑>
어느 날 바리사이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합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가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릅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는 그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내버려 두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외간 여자가 몸을 만지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고,
죄인과 접촉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루카 7,39)."
아마도 그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예언자로 생각하고 식사 초대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죄인인 여자의 행동을 내버려 두시는 것을 보니
예언자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진짜로 거룩한 예언자라면
죄인인(부정한) 여자가 자기 몸을 만지도록 내버려 두어서
부정을 타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약 율법은 부정한 사람이나 물건과 접촉해서
부정 타는 짓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에 묘사된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 예수님은 반대로 행동하십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부정한 죄인들과 접촉하셔서
당신의 거룩함으로 죄인들의 부정함을 씻어내고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생각을 꿰뚫어보시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루카 7,47ㄴㄷ)."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여자는 이미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이 여자의 행동은 자기가 용서를 받은 것에 대한 큰 감사와 사랑의 표시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의 용서를 언제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용서를 받은 상태이고,
그래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르는 행동은
'회개의 표시'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인인 여자'와 접촉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이었지만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서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여자'와 접촉하신 것입니다.
뒤의 48절의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여자가 이미 죄를 용서받은 상태라는 것을
다시 확인해 주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만일에 여자의 행동을 '회개'로 해석한다면 47절의 말씀과 맞지 않게 되고,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라는 42절의 말씀과도 맞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여자가 그 전에 이미 용서받은 상태라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행동은 '회개의 표시'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라는 47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좀 더 자세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은 '더 많이' 용서하시고
어떤 사람은 '더 적게' 용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물론 죄가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죄를 용서받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많이'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만일에 '더 많이' 용서받기 위해서 '더 많은' 죄를 지어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궤변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잔치는
죽은(집을 나간) 아들을 위한 잔치가 아니라
다시 살아난(집으로 되돌아온) 아들을 위한 잔치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겠다고 일부러 집을 나간다면,
또 착한 목자의 사랑을 받겠다고 일부러 길 잃은 양이 된다면,
그것은 이중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죄와 하느님을 시험하는 죄.
(또 흔히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죄인을'이 아니라 '죄인도'가 올바른 표현입니다.)
어떻든 이야기 속의 여자는
남들보다 더 많이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남들과 똑같은 용서를 받았는데도
남들보다 더 큰 감사를 느낀 사람이고,
그래서 남들보다 더 큰 사랑을 드러낸 사람입니다.
(더 크게 사랑해서 더 깊이 회개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용서와 사랑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르고(적게 감사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적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또 죄를 지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경우가 많은데,
나중에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닫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크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병에 걸렸다가 건강을 되찾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처음부터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일인 것처럼.
~ 송영진 모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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