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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이야기] (15) 아버지이신 하느님; 아빠, 아버지

dariaofs 2013. 9. 20. 09:55

작성자 : 조규만 주교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 하느님


구약성경에서 복합적 요소를 지닌 신의 면모가 야훼 표상 안에 수용된 것과 같이 신약성경에서 단일적 성격을 띤 하느님 면모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어느 때는 하느님 심판에 대해, 또 어느 때는 하느님 자비에 대해 언급한다. 또는 심원한 간격을 지닌 하느님,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아무도 보지 못한 하느님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보여주시고 명백한 말씀으로 알려주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히브 1,3)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하느님은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뵐 수 있는 분이 된다. 이러한 기록은 하느님은 오직 한 분밖에 안 계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한편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소개하신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로 시작하는 신경과 하느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가르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생애와 말씀을 통해 직접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은 새로운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전수돼 온 하나의 신앙이 이스라엘 사람들 사상과 그리스도인들 사상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이 된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한때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삼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당신 백성으로 만들었다.


 신약의 하느님도 구약의 하느님처럼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는 인격적 하느님이시다. 특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드림으로써 하느님 인격성은 더 새롭게 드러난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세례와 거룩한 변모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로 불렀고, 예수님 또한 하느님을 '압바' 또는 '아버지'라고 불렀다. 특히 '압바'란 말은 아람어로서 일차적으로 가정에서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매우 정다운 호칭이다.


 '아버지'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이 단어는 종교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오랜 역사를 통해 'genitore(생식적 차원에서 생명을 준 사람)'를 의미한다. 생명의 창조자, 생활의 부양자, 보증자인 것이다.


 신이 아버지라는 사상은 아주 보편적이지만 구약에서는 하느님을 가리켜 '압바'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를 하느님 아들로 여겼다. 물론 여기서 '아들됨'은 신화적 의미에서가 아니다. 역사 안에서 구원 업적에 대한 구체적 체험을 바탕으로 인식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즐겼다.


 신약성경은 그 완성을 보여준다. 구약성경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해왔던 것을 신약성경은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확정지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구나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분으로 계시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와 같은 모습은 루카복음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 구체적으로 잘 묘사돼 있다. 예수님 강생은 하느님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실제 사건이 되게 한 것이다. 특히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라는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말씀으로 하느님이 아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인간들 아버지이심이 선언됐기 때문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하느님 자녀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자녀가 되는 데는 옳은 사람, 옳지 못한 사람의 구별이 없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여성과 남성의 차별도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오히려 대접받지 못한 당시 여성들에게 극히 이례적인 존경심을 갖고 대하셨고, 힘없는 어린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애정을 갖고 그들을 받아들였다.

 

병자나 소외된 인간일수록, 장애자일수록 그들을 위해 필요한 자로 처신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의식주는 물론 머리카락 하나까지 돌보신다.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귀한 존재인 까닭이다. 때문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베푸는 선행은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상급으로 베풀어진다.


 우리는 구약성경이 어렴풋이 보여준 하느님 부성을 예수님에게서 명료하게 보게 된다. 신약의 커다란 특징은 성부의 종말론적 계시가 예수님이라는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아버지로 계시된 하느님께 이제 누구나 온전한 신뢰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부성애로 인간을 감싸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아주 자상한 분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소박한 신뢰성과 경외감을 동시에 잘 표현해주고 있는 좋은 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 권위와 주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전인적 행위로써 하느님께 대한 경외감을 심화시켜준다. 하느님은 만민의 심판관인 동시에 아버지로서 악에 대한 진노를 참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로서 자비로운 하느님과 준엄한 하느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하느님 진노도 자비와 함께 인간에 대한 하느님 부성애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하느님 진노는 인간 죄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사랑의 한 측면이다.

 

하느님이 아버지라고 해서 하느님 정의와 공정성이 배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경외함으로써 모든 행실에 있어서 하느님 자녀다운 모습을 드러내도록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