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은 시대 정신인가?
지난 호에 말씀드렸듯, 이 글은 이미 발표한 학술논문을 다시금 쉽게 설명하는 목적으로 쓴다. 학문적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 꼭 갖춰야 하는 엄격한 격식을 벗고, 동료 신자들과 쉽게 나누려는 자리다.
먼저 필자에게 영감을 주었던 책 한 권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이 책은 ‘탐욕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인가?’하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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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노 같아 보이는 할아버지가 우리를 노려보는 이 표지를 보며 처음에는 이런 수전노에 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다 읽고 보니, ‘수전노의 마음’이 지배하는 현대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신학적인 문제제기가 눈에 들어왔다.
두 가지 태도
눈길을 끈 것은 상반된 종교적 마음과 태도다. 근대 이전의 ‘마음과 태도’는 현대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이 책에 나온 예를 들어 보자. 우연히 길거리에서 거지를 만난 상황이다. 그러면 몇 닢이라도 주는 것이 선(善)이다. 적어도 근대 이전에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그런 태도가 존중받았다.
거지에게 주려고 일부러 푼돈을 챙기는 ‘착한 마음씨’도 칭송 받을 일이었다. 종교인들과 지식인들은 그런 삶의 태도를 권장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지에 대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거지에게 돈을 주는 행위는, 나태함을 도와주는 ‘악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거지를 진정으로 도와주려면 돈을 주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다. 그래서 누구나 몇 푼을 떨궈주기 전에 마음속으로 ‘멈칫’한다.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 보다는, 돈을 주지 않음으로써 나는 거지를 ‘진정으로 도와주었다고’ 오히려 위안을 받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근대 이전 세계에서 ‘선행’으로 인정받는 일이 ‘순진한 자의 악행’으로 인식되는 이 대립과 간극은 어떻게 발생한 것일까? 이런 ‘종교심의 변환’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번에는 부자들이다. 근대 이전에 부자들은 귀족이나 양반이었다. 그들은 신분이 달랐던 만큼 돈을 버는 일에 체면과 명분을 중시했다.
적어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대함과 너그러운 태도를 지니고 있어야 제대로 된 부자로서 존경받을 수 있었다. (비록 ‘위선’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윤’과 ‘가치’를 동시에 추구했다. 종교인과 지식인은 그런 ‘귀족적 태도’를 권장했다.
하지만 요즘의 부자들은 귀족이 아니다. 그들은 ‘가치’나 ‘명분’에 무관심하다. 돈에 묻은 의미를 따지지 않는다. 오히려 순수한 ‘이윤 자체’를 추구한다. 거지를 위해 푼돈을 따로 챙겨주는 일에도 관심이 적다.
그런 일을 ‘낭비’요 ‘손실’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근대 이전에는 ‘인색함’으로 비난 받을 일이 ‘합리적 절약정신’으로 미화된다. 이에 발맞춰 사회는 ‘무제한적 이윤창출’을 허용하고, 때로는 권장한다.
라인하르트는 유럽에서 이제 귀족은 사라졌다고 한탄한다. 한국보다 ‘귀족의 의무’(노블리제 오블리주)가 비교적 발달한 독일의 상황도 그렇다고 한다.
베버와 칼뱅이 아니라, 미국식 자본주의가 원인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흔히 막스 베버나 칼뱅주의가 원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라인하르트는 아니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베버나 칼뱅은 오히려 건강한 자본가 정신을 세우려는데 관심을 보였다.
곧, 새로운 시대의 ‘귀족 윤리’를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 칼뱅주의는 ‘탐욕’보다는 ‘금욕’을 강조했다.
칼뱅주의를 쉽게 말하면 이렇다. 그는 이익을 얻기 위해 절제하는, 곧 자본가의 금욕을 강조했다.
그래서 금욕적 생활을 통해 알뜰하게 축적된 자본이 재투자되어 일자리와 생산성이 증대하는 선순환의 경제, 곧 자본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하는 종교적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뱅이 원하는 세상은, 자본가는 검소하게 살며 성실하게 노력하고, 회사는 내실 있고 튼튼하게 운영되는 사회였다.
라인하르트는 훗날 미국에서 한발 더 나아간 칼뱅주의가 현대의 종교심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곧 미국식 개신교가 ‘금욕’과 ‘성찰’ 따위를 저 멀리 뒤편으로 미뤄버리고, 믿기만 하면 물질적으로 보상받는 공식을 만들었다고 본다. <‘은총’과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보증하는 ‘믿음’>이 발명된 것이다.
미국식 성공주의 개신교 또는 그를 좇는 한국의 일부 개신교가 이런 식의 종교심을 주로 퍼뜨리고 있다.(이 점에서 가톨릭 교회가 완전히 자유로울지 모르겠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 책에 들어 있다)
신학적 질문
이 책에서 필자가 읽은 신학적 문제의식은 이렇다. 거지와 자본가에 대한 태도만 급변한 것이 아니다. 가톨릭교회의 이른바 칠죄종(七罪宗 Septem peccata capitales)인 교만, 인색, 음욕, 탐욕, 질투, 분노, 나태에 대한 감수성을 현대인은 거의 모두 잃어버린 것 같다.
이를테면 ‘교만의 죄’보다는 ‘긍정적 우월감’에 훨씬 익숙하다. 요리 프로그램이나 홈쇼핑을 보면 과식과 식탐 등 탐욕의 하위범주는 아예 현대인의 고려대상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삶의 기쁨’만이 탐닉되는 것 같다.
어마어마한 음식재료를 낭비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다른 칠죄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라인하르트는 함축적으로 묻는다. 과연 탐욕이란 이 시대의 “시대정신일까?”(72쪽)
그렇다면 구약성경의 탐욕이란?
필자는 이렇게 급변한 종교적 태도를 새롭게 성찰하여 객관화하는 일이 ‘현대의 탐욕’을 넘는 성찰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결국 성경이라 보았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성찰과 체험이 축적된 구약성경에서 탐욕은 무엇인지 새롭게 정리해 보고 싶었다. 그것은 ‘근대 이전의 이전’, 곧 고대의 탐욕에 대한 성찰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일이기도 했다.
새롭게 탐욕이라는 주제를 성찰함으로써 탐욕에 대한 고대의 성찰과 성경의 원초적 마음에 접근하려는 신학적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일은 철저히 구약성경 본문 그 자체에 충실한 과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구약학이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신학의 다른 분야는 물론이고 전체 인문학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이렇게 학문간 소통의 물꼬를 트는 일은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구약성경 본문에서 관찰한 ‘탐욕의 세 가지 무늬’는 다음 글부터 하나씩 연재하겠다.
*이 글은 다음의 논문을 쉽게 설명하는 글입니다. 주원준, '구약성경의 세 가지 ‘탐욕’ - 히브리어 본문의 문학적·언어학적 관찰과 해석' <인간연구>(가톨릭 대학교 인간학 연구소, 22호 2012 봄) 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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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른바 ‘평신도 구약학자’.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성서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했으며 세부전공은 성서언어학이다. 히브리어와 그 친족어들을 즐겨 다루고, 고대 근동과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발표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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