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둘째 무늬 - 내면의 쾌락
둘째로 살펴볼 단어는 חמד[하.마드]이다. 이 말의 기본형을 대개 영어로 ‘원하다’(desire)로 옮기지만 우리말로는 ‘탐하다’가 더 맞을 것 같다.
탐하다
이 낱말의 부정적 의미를 잘 나타내는 예문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다.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탈출 20,17: 십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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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단독으로 사용되어도 부정적 뜻이지만, ‘탐을 내어 ~을 취하다/차지하다’는 관용적 표현으로 쓰일 때도 부정적이다. 부당하게 탐을 내어 의롭지 못하게 취했다는 뉘앙스를 주는 표현들이다. 탐을 내면 빼앗는 결과는 자연스러운 것 같다.
“너희는 그들의 신상들을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 위에 입혀진 은이나 금을 탐내어 너희 것으로 삼지 마라.”(신명 7,25: 이스라엘과 이민족의 관계)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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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즐거움
흥미롭게도 이 동사는 ‘~을 기뻐하다’도 의미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의 겸손하고 소박한 모습을 묘사하는 데 이 동사를 사용하였다.
동시에 우상숭배를 일삼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묘사하는 데도 이 동사를 사용하였다. 역시 히브리어의 함의를 주의하며 읽어보자.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만한(탐할만한) 모습도 없었다.”(이사 53,2)
“너희가 좋아하는(탐하는) 그 참나무들(=우상) 때문에 너희는 정녕 수치를 당하리라. 너희가 선택한 그 정원들 때문에 너희는 창피를 당하리라.”(이사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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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히 탐하는 즐거움
이 동사의 강화형(피엘형)은 ‘강렬히 탐하다’의 뜻이다. 대개 ‘강렬히 소망하다’로 옮긴다. 아래 아가의 인용문은 탐하는 자의 ‘내적 즐거움’을 더욱 잘 표현한다. 탐하는 자의 성적 즐거움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 사이에 있는 나의 연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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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 동사는 ‘탐하다’를 의미하는 동시에, 탐하는 자의 내적 심리, 곧 ‘탐하는 즐거움’을 의미한다. 여기서 고대 히브리인들의 삶의 지혜를 찾아 볼 수 있다.
무엇인가 탐하는 것은 내적 즐거움, 곧 쾌락을 동반하는 일이다. 탐하는 마음과 쾌락은 뿌리가 같은 낱말이다.
탐욕에 휩싸인 인간은 불의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내면세계는 쾌락으로 가득 찰 수 있다. 탐하고 차지하는 입장에서는 즐거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 또한 탐욕의 본질이다.
탐스러운
이 낱말의 수동형의 의미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 오해의 가능성을 무릅쓰고 직역을 해 보자면, ‘탐나는 마음이 생겨나다’가 될 것이다.
만일 이 수동형에서 형용사가 파생했다면, 그 의미는 ‘탐하는 마음이 드는’, 곧 ‘탐스러운’으로 옮길 수 있다.
이런 히브리어 뉘앙스를 정확히 알면, 태초의 에덴동산에 있었던 나무 열매를 묘사한 문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 나무를 보고 최초의 인간의 마음에 ‘탐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느낌이 들었다.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겉모습에 탐나는 마음이 들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세 2,9: 에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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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결론: 탐욕과 쾌락은 뿌리가 같다.
탐하는 마음의 뿌리에는 즐거움이 함께 한다. 탐욕은 탐한 마음으로 빼앗는 사람의 내면적 쾌락을 동반한다. 불의한 일로 이끄는 내적 즐거움이다. 그런 마음이 낙원에서 저질렀던 최초의 죄에 맞닿아 있다.
구약성경은 이런 즐거움을 추구하는 마음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상을 향하는 마음도, 야훼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도 같은 동사를 써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주님을 향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큰 즐거움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탐하는 마음의 양면성을 묘사했다.
현대의 사회와 문화는 개인적 욕망에 관대하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는 무제한적인 욕망을 긍정한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그런 개인적인 욕망의 추구를 기본적으로는 긍정하면서도, 그런 마음이 바로 불의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성찰했다. 탐욕은 즐거움과 뿌리가 같다.
지금까지 탐욕의 두 가지 무늬를 보았다. 첫째는 이기심, 둘째는 속마음의 쾌락이었다. 모두 내면의 것을 지적했다. 다음에는 세 번째 무늬를 보겠다. 그것은 사회적이고 권력자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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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이른바 ‘평신도 구약학자’.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성서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했으며 세부전공은 성서언어학이다. 히브리어와 그 친족어들을 즐겨 다루고, 고대 근동과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발표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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