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9)과학과 신앙 간의 부적절한(?) 접목 시도의 예들
물질적 실체의 법칙을 비물질적 실체에 근거 없이 확대 적용
과학에서 발견된 특정 현상을
초자연적으로 해석해선 안 돼
바닷가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사람. 물질적 실체에 적용되는 과학 법칙을 교묘하게 인간의 마음이나 우주 에너지에 연결짓는 식의 주장이 존재한다. 이는 과학과 영성 간의 부적절한 접목으로, 소위 ‘뉴에이지 운동’의 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예전의 글을 통해 제가 여러 차례 강조해 드린 바와 같이 ‘과학과 신앙은 둘 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라는 엄마로부터 함께 탄생한 쌍둥이’입니다.
그래서 과학과 신앙은 창조주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섬기기 위한 두 도구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각자의 영역만을 고집스럽게 강조하고 다른 영역을 무시하는 것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섬긴다는 차원에서 교회에서 강론이나 서적을 통해 과학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신앙은 대략 200년 전부터 각자 고유한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다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방식으로 공존해 오게 되었습니다.
과학은 오감을 통한 관찰이 가능한 물질적 세계를, 신앙은 관찰 불가능한 비물질적 세계를 맡는 식이었죠. 다시 말하면 과학은 물질과 육신을 다루는 반면, 신앙은 영혼과 정신을 다루는 것으로 현재까지 공존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소위 1세계 국가들과는 달리 과학자 집단과 교회 사이에 서로의 영역을 거의 건드리지 않으면서 큰 긴장이 없이 나름 평화로운 공존을 해온 편에 속합니다.
덕분에 신앙을 가진 과학자분들이 우리 주변에 생각 외로 많이 계십니다. 그리고 일선 신부님들 중에 과학의 예를 들면서 강론을 해도 거의 문제 삼는 경우가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을 예로 드는 이러한 강론들이나 신앙 저서들 중에서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 해석이 들어간 경우들이 간혹 보입니다.
과학과 특히 영성 간의 접목을 시도할 때에는 ‘유비(類比)적 차원’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할 경우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에 들어와서 과학과 영성 간의 부적절한(?) 접목으로 인해 많은 폐해가 발생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저의 견해를 간략하게나마 말씀드릴까 합니다. 일선 사목을 하시는 분들과 신자분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좋은 말을 써놓은 통과 나쁜 말을 써놓은 통에서 언 얼음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좋은 말을 써놓은 통은 얼음 결정이 예뻤고, 나쁜 말을 써놓은 통에서 언 얼음은 결정이 못생겼다.
물질의 상태와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자들, 특히 저를 포함한 물리학자들이 에너지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생각과 감정은 긍정도 부정도 실체화하는 원동력이 된다. 강한 생각은 비슷한 기운을 끌어당긴다. 그러니 네가 이루고 싶은 것을 생각해라. 계속 생각해라. 그럼 우주의 에너지가 그것을 이루어줄 것이다.”
이 책 출판 이후 전 세계의 많은 독자들이 이 책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언급을 했습니다.
실제로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 할 수 있는 뉴턴의 중력 법칙(우리나라에서 흔히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불리고 있죠)은 인력 법칙(law of attraction)의 한 예에 속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물리학의 인력 법칙, 자기계발서의 공통 주제인 긍정의 힘 강조, 기복 신앙적 태도 등이 적절히 결합된 뉴에이지 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김도현 바오로 신부(서강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