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2년 8월 2일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사제 -성 에우세비오 주교

dariaofs 2022. 8. 2. 01:44

복음: 마태 14,22-36: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23)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신 것은, 조용한 곳에서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분은 외딴곳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때가 많다.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는데, 파도에 시달린다.

 

맞바람이 불어오자 제자들의 배는 폭풍 가운데에서 마구 뒤흔들린다. 배는 풍랑 속에 있어도 그대로 배이다. 이 배는 제자들을 태우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

 

이 배로 주님께서 오신다. 그분은 크나큰 어려움에 부닥쳐 안절부절못하는 제자들에게 오신다. 주님께서는 “나다”(27) 말씀하시며 두려움을 말끔히 씻어버리신다.

 

배는 유혹의 맞바람에 흔들리고 있지만, 바다의 모든 파도, 즉 이 세상의 모든 권능 위를 걸으시는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26).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 라고 하였다.

 

“오너라.”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갔다(29). 베드로는 물 위를 가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자 두려워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바람이었다. 호수가 바람보다 더 위험한 데도 바람을 더 두려워했다. 물에 빠진 후에야 주님께 구해달라고 소리친다.

 

주님께서는 구해주시며,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 하신다. 주님은 베드로를 구해주셨다.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청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과 물결이 그쳤다. 그들은 모두 경탄하며 “참으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3) 하고 주님께 절을 하였다.

 

주님께서는 사도들 가운데 첫째인 베드로를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양 떼를 그에게 맡기시며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 말씀하셨다.

 

사도들은 배 안에 있으면서, 즉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주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포하였음을 의미한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란, 절대 넘어지지 않는, 실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계속 주님께로 나아가는 사람, 계속 새로이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쓰러질 수 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며,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 베드로 율리아누스 예마르(Petrus Julianus Eymard)는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의 라 뮈르 디제르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칼 장수였으므로 18세 때까지 부친의 일을 거들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라틴어를 배웠기에 1831년에 그르노블의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34년 7월 20일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동안 샤트와 몽테나르 본당 사목자로 일하던 중 마리스타가 되기 위하여 주교의 허락을 청하였다.

 

1839년 ‘마리아의 작은 형제회’(마리스타 교육 수사회)에 입회하여 수련을 받은 후 그는 벨리 소신학교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1845년에는 리옹(Lyon) 수도원의 관구장이 되었다.

한번은 그가 주님의 성체 축일에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나의 영혼은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나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그분의 현존을 전하겠습니다.”

 

1851년 성 베드로 율리아노 예마르 신부는 노트르담 드 푸르비에르를 순례한 후 ‘성체 사제회’ 설립을 구체화시켰다. 1856년 마리스타 총장의 승인을 받은 그는 12일 동안이나 파리(Paris)의 대주교를 설득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래서 1857년 1월 6일 이 위대한 수도회가 빛을 보게 되었다. 1858년 그는 또 ‘성체 시녀회’를 설립하였고, 1895년에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Maria Vianney, 8월 4일) 신부도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참으로 위대한 성인이었다. 그는 1925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62년 12월 9일 교황 요한 23세(Joannes X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에우세비우스(또는 에우세비오)는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egna) 섬 태생으로 어느 순교자의 후손으로 어렵게 자랐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이사하였기 때문에 성 에우세비우스는 로마에서 성장하고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베르첼리의 초대주교로 선출되어 그곳에 착좌하였다. 그는 교구내의 성직자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성직생활과 수도생활의 일치를 시도했던 서방 교회의 첫 번째 주교로 손꼽힌다. 그는 일단의 성직자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그는 정통 교회를 고수하는 강력한 주교였다. 아리우스파(Arianism)에 대한 그의 강력한 반대 입장 때문에 그는 많은 곤욕을 치렀는데,

 

355년 밀라노(Milano) 회의에서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를 단죄하는 결의를 반대한 결과로 인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6년 동안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너무나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하였기에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4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카파도키아(Cappadocia)로 또 그 다음에는 이집트의 테베(Thebae,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고대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수도로 오늘날의 룩소르 Luxor)로 유배를 갔다.

361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고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에 유배된 주교는 각자의 교구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에 따라 귀향하였고, 362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안티오키아(Antiochia)로 파견되는 사절로 뽑혔는데, 그의 임무는 331년에 아리우스파에 의하여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출된 멜레티우스(Meletius) 추종자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세월만 허송하였다. 그 후 그는 일리리쿰(Illiricum) 지방을 다니며 정통 교회를 옹호하고 아리우스파를 배격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고, 363년에 베르첼리로 돌아왔다.

 

그는 여생을 성 힐라리우스(Hilarius, 1월 13일)와 함께 아리우스파와 싸우는데 보냈다.

베르첼리에는 라틴어로 된 복음서 사본이 보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 사본은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의 불가타 사본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성 에우세비우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본을 “베르첼리의 사본”(Codex Vercellensis)라고 한다. 그는 “아타나시우스 신경”(Symbolum Athanasianum)의 저자 중의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