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2년 9월 3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dariaofs 2022. 9. 3. 01:53
복음 루카 6,1-5

 

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
 
2 바리사이 몇 사람이 말하였다.

“당신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한 일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집어서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5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몇 년 동안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마스크 때문입니다.

 

얼굴의 거의 절반을 가리다 보니 누구인지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읍내에 있는 빵집에 갔다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식빵을 사기 위해 이 집을 가끔 들리는데 사장님께서 “신부님이시죠?”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사제임을 쉽게 알 수 있는 로만칼라를 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반바지에 흰색 면티를 입고 있어서 겉모습만 보면 그냥 동네 아저씨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신부인지를 아셨는지, 혹시 성당에 다니시냐고 여쭈었습니다.

신자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지난번에 한번 로만칼라를 하고서 빵집에 왔던 것을 기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스크도 쓰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신부님 눈이 많이 처져 있어서 기억났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눈 하나만으로 저를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을 잘 기억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징적인 것을 잘 관찰하고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 사장님께서 그런 분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의 전부를 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큰 특징인 사랑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주님을 알려고 합니다.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한 충돌이 일어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때를 가리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율법 자체가 절대적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이 있다면 관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손을 비벼 먹은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밀 두 이삭 이상을 따면 그것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또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곡식을 타작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하긴 안식일에 떨어진 과일을 먹어서는 안 되었고, 과일이 떨어질 수 있으니 안식일에 나무에 올라가서도 안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난 계란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고발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잊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법으로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을 율법으로 얽어매서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알려면, 주님의 사랑만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을 보고서 주님을 알려고 한다면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예수님을 반대했던 종교 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하늘은 아무런 행운도 없는 자를 태어나게 하지는 아니하며, 땅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존재를 길러내지는 않는 것이다(명심보감).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유한 귀족 고르디아누스(Gordianus)의 아들로 태어난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또는 그레고리오)는 로마(Roma)에서 교육을 받았고,

 

랑고바르드족(Langobard)의 이탈리아 침략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을 당시에는 로마의 장관이었다.

 

수도생활을 오랫동안 꿈꾸어 왔기 때문에 그는 574년경에 로마와 시칠리아(Sicilia)에 수도원을 세우고 35세경에 수도자가 되었다.

 

579년부터 585년까지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활약하다가, 5년 후에 자기 수도원으로 돌아온 뒤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수도자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교회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시켰으며, 막대한 경비를 들여 자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랑고바르드족(Langobard)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켰으며,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을 보호하고, 기근의 희생자들을 구호하였다.

 

593년 그는 랑고바르드족 침략군을 설득하여 로마를 평정시켰으므로 랑고바르드족의 왕과 함께 평화의 수호자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위대한 주교이자 정치인이었다.

또한 그의 학덕은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레굴라 파스토랄리스’(Regula Pastoralis, 주교의 직책과 의무), ‘모랄리아’(Moralia, 욥서 주해),

 

‘대화집’을 비롯하여 800여 통의 서한들 속에 담긴 그의 사상은 서방교회의 공식 예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유럽의 역사에도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는 잉글랜드(England)의 개종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고,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였으며,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위대한 설교가였고, 로마 전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결과, 그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추앙받는다.

 

또한 베네딕토 수도회를 면속시켜 교황의 권위 하에 두었다. 그는 라틴 교부의 일원으로 공경을 받으며 중세 교황직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서거 즉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