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22년 9월 13일 성 요한 크리시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dariaofs 2022. 9. 13. 01:26

 

복음 루카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누가 사람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앵’하고 태어나, ‘휙’하고 살다가, ‘억’하고 죽더라.”

맞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인생이 긴 것 같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얼마 전에 서울 신학교 동창 신부가 강화에 찾아왔습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신학교 다닐 때의 사건 사고를 이야기했고, 또 재미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실컷 웃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데 벌써 30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에 하늘 같았던 교수 신부님들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지금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기다릴 때 가장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돈? 명예? 권력?

그 모든 것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일한 것이 기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억을 많이 간직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의연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최후의 순간에 어떤 기억을 떠올릴 것 같습니까?

고을 성문에서 두 행렬이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일행이었고, 또 하나는 마을에서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죽은 이는 한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과부는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를 바라보며 유일한 희망을 걸고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제 그 아들마저 잃은 이 여인의 처지는 어떠했을까요?

 

당시는 여자 혼자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외아들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죽음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 죽음 앞에서 힘든 기억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서 있는 외아들의 어머니를 가엾이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울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구원의 행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기억만을 만들면, 결국 후회를 남길 수밖에 없는 삶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주님께 대한 기억이 구원의 큰 선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게 바로 살아 있는 거라고 그녀는 말했다(천운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Joannes Chrisostomus, 또는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Antiochia)에서 아버지 세쿤두스(Secundus)와 어머니 안투사(Antusa) 사이에 태어났는데,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고 344-354년 사이로 추정된다.

 

아버지 세쿤두스는 어머니 안투사가 20세 되던 해에 사망했기 때문에, 요한은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세속적인 출세를 위해 이교도 수사학자인 리바니오로부터 수사학을 배웠으나,

 

이런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친구로 후에 타르수스(Tarsus)의 주교가 된 디오도루스(Diodurus)와 함께 성서 연구와 수덕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371년 안티오키아의 멜리티우스(Melitius) 주교는 그에게 독서직을 주고 자기 곁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러나 평소부터 수도생활을 갈망하던 그는 인근 광야에 가서 노(老) 은수자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 생활하였으며,

 

더 적극적인 수덕 생활을 열망하여 동굴에 들어가 2년간 고행과 성서 독서의 생활을 하였다.

 

지나친 고행으로 건강을 크게 해치자, 어머니 안투사의 눈물어린 간청 때문에 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그는 381년 멜리티우스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았으며, 386년에는 플라비아누스(Flavianus)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 후 12년간 안티오키아의 설교 사제로 활약하면서 수많은 명강론을 하였다.

 

그의 강론이 너무 유명해서 크리소스토무스(Chrisostomus), 즉 ‘금구(金口)’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390년부터는 신약성서에 관한 연속 강론을 실시하여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사망하자 황제는 성 요한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로 임명하려 하였다.

 

그는 이를 거절하였지만 황제의 뜻이 워낙 완강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하였다.

 

그래서 398년 2월 26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테오필루스(Theophilus)로부터 주교품을 받았다.

 

수도의 총대주교가 된 그는 궁중생활과 너무나 밀착되어 부패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화려한 생활을 질타하고, 신자들이 생활을 윤리적으로 쇄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구호사업을 시작함으로써 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에페수스(Ephesus)에서 주교회의를 개최하여 성직매매를 한 6명의 주교를 면직시켰다.

그러자 총대주교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적대자들이 연대하여 요한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가장 극렬한 적대자는 그에게 주교품을 준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총대주교였다.

 

한편 처음에는 황실과의 관계가 좋았으나 황후의 지나친 사치와 탐욕을 비난하여 악화되었다.

 

그는 403년 콘스탄티노플 근교인 퀘르치아(Quercia)에서 개최된 주교회의에서 적대자들의 근거 없는 모략으로 고발되어 면직되었으며,

 

소심증이 있던 아르카디우스(Arcadius) 황제는 이 결정을 받아들여 그를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신자들이 이 결정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이에 놀란 에우독시아(Eudoxia) 황후는 그의 유배를 취소하였다.

 

이 첫 번째 유배는 오래가지 않았으며, 성 요한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귀환하였다.

 

그 후 404년에 황제는 그를 다시 쿠쿠수스(Cucusus, 지금의 알바니아)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그를 만나보려는 신자들의 순례행렬이 계속되자 황제는 다시 흑해 동편의 피티우스(Pityus)라는 험한 숲속으로 유배지를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 요한은 새로운 유배지로 가던 중 407년 9월 14일 코마나(Comana)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요한은 금구라는 별명에 걸맞게 수많은 명강론과 저서를 남겼다. 그의 강론에는 사도 바오로(Paulus)의 서한들이 많이 인용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Innocentius I)는 412년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Roma)의 베드로 대성전 성가대 경당에 안치되어 있다.

 

1568년 교황 비오 5세(Pius V)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면서 ‘동방의 네 명의 위대한 교회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