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라든, 나는 전진하리라” 조선 선교 열망했던 선구자
아시아 선교에 대한 일념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
초대 조선대목구장 임명받고
고된 밀입국 여정 끝에 숨져
끝내 펼치지 못했던 선교 의지
유품 편지 통해 아직도 생생히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욥 주교)는 지난 3월 23일 조선대목구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서울대교구 제11대 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한국 순교 복자 가족 수도회 설립자 방유룡(레오)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세 성직자가 보여준 영웅적인 덕행과 성덕이 한국교회와 신자들, 수도회와 회원들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다.
박해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세 성직자는 어둡고 척박한 길 위에 불을 밝히며 한국교회와 함께했다. 그리스도교적 덕행을 실천했던 세 성직자가 한국교회 안에 남긴 의미있는 발자취를 소개한다.
■ 아시아 선교를 향한 갈망, 조선으로 가닿다
끝내 조선 땅을 밟지 못한 조선대목구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조선의 신자들을 사랑하고 아낀 성직자였다.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는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서남부 레삭 마을에서 태어났다. 1815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듬해부터 1825년까지 모교인 카르카손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신학생을 가르쳤는데, 아시아 선교를 갈망한 나머지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다.
네 달 반 동안 선교사 연수를 이수한 이후 지금의 태국인 샴의 선교사로 발령을 받은 브뤼기에르 주교. 1827년 6월 4일 샴 수도 방콕에 도착한 그는 교구청 일과 방콕 본당 사목에 힘쓰는 한편 20명 남짓한 신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한에서 조선에 대해 처음 언급한 것은 1826년 무렵이었다. 방콕에서 성직자가 없는 조선 교우들의 어려움을 들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들을 도우러 가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하지만 현재 몸담고 있는 샴교구에서 사목을 충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다시 조선과 인연이 닿은 것은 1829년 무렵이었다. 1825년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하던 조선 교우들이 교황에게 성직자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이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9년 6월 9일, 조선 선교를 자청하는 편지를 교황청 포교성성(현 복음화부)으로 보냈다.
그리고 6월 29일 방콕에서 샴교구 보좌주교로 주교품을 받은 이후 말레이시아 반도 서쪽에 있는 섬인 페낭으로 가서 교황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리고리오 16세 교황은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신설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대목구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소식을 이듬해 7월 25일에야 전해 들었다.
조선대목구 대목구장 임명 소식을 듣고 바로 조선으로 향한 브뤼기에르 주교. 1832년 8월 4일 페낭을 출항해 싱가포르, 마닐라, 마카오, 중국 푸저우·난징을 거쳐 1834년 10월 8일 중국 허베이성의 시완쯔(西灣子) 교우촌에 이르러 한 해를 보냈다.
1835년, 조선에 가기 위해 다시 채비를 마친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밀입국할 결심을 하고 10월 7일 시완쯔 교우촌을 떠났다.
12일 만에 마자쯔(馬架子) 교우촌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고된 여정을 버티지 못하고 교우촌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 고난 이겨낼 수 있던 힘, 조선 신자들의 신앙과 그들에 대한 사랑
의지가 강하고 독립심이 컸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성품은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그를 아는 한 장상은 “브뤼기에르 신부가 주교가 된다면 그는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누가 뭐라든, 나는 전진하리라’를 사목 표어로 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그의 강건함은 아시아 선교를 향한 갈망으로, 나아가 조선교회를 일구겠다는 의지로 드러났다.
아시아 선교를 결심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카르카손에서 부모님께 편지를 부쳤다. “제가 여러 해 전부터 결심한 것은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도 아니며 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도 아닙니다….
저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부족한 제가 양심을 깊이 성찰하면 할수록 은혜롭게도 하느님 친히 제게 선교사가 되라는 열망을 심어 주셨다고 생각됩니다.”(1825년 9월 8일자 서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6년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 있을 때, 카르카손교구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조선 교우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베이징으로 교우 대표를 보내어 성직자를 요청했지만 늘 성과가 없었다”며 “조선행 성소를 받은 선교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이 고생하는 복락을 누릴 것”이라며 조선에 대한 관심을 내비쳤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쪽의 먼 나라 조선에서 전해진 소식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음을 흔들었다.
“일본사람들처럼 조선인들도 쾌활하고 영적이며 호기심이 강하고, 일단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 신앙심이 요지부동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저 불쌍한 조선 교우들을 돌볼 사제가 온 유럽에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1827년 2월 4일 페낭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 총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은 파리 외방 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맡아주길 바란다고 전했지만 파리 외방 전교회는 어렵다고 답했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 지도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내 “저 불운한 조선 교우들에게 선익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이 편지를 쓴다”고 밝히며 파리 외방 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망설이는 이유 5가지를 하나하나 따지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조선으로 가고자 하는 선교사가 없으면 자신이 조선 선교를 자원한다고 밝혔다.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 조선 신자들과의 만남을 간절히 염원했지만 그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싱가포르, 마카오를 거쳐 중국 마찌아즈까지, 3년 넘게 이어진 고된 일정은 물론이고 난징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가 파리 외방 전교회 성직자들의 조선 입국을 막으면서 고비를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조선으로 향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다”며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진다”라는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마지아쯔(馬架子) 교우촌에서 세상을 떠났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교우들에게 남긴 단 한 통의 편지. 조선에 닿지 못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자들에 대한 사랑은 편지를 통해 남아있다.
“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위로를 위하여 성사를 거행하고 성교회의 경계를 넓혀 나갈 조선인들을 사제로 서품할 것입니다.”(1832년 11월 18일 마카오에서 보낸 서한)
민경화 기자(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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