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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교회의 등불이 되다 (3) 방유룡 신부

dariaofs 2023. 5. 2. 00:24

한국적인 수도 영성에 바친 신앙 열정, 이 땅 교회의 뿌리 되다

초기교회 순교자 신앙 모범
사제로서 실천하기로 다짐
일제 압제와 폭정 이겨내고
민족 정신문화 유산 계발
‘면형무아의 삶’ 봉헌하는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설립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 수난의 역사를 경험했던 방유룡(레오) 신부는 주변국들의 개입으로 중심을 잡기 어려운 한국의 상황을 목도하며 한국교회의 뿌리를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한국교회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가까이에서 접했던 방 신부의 삶은 훗날 순교자들을 본받는 영성을 사는 한국 순교 복자 가족 수도회를 창설하는 기반이 됐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주교)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세 성직자 중 세 번째로 한국인에 걸맞은 고유한 수도 영성을 만들어 전파했던 방유룡 신부의 삶을 소개한다.

■ 종로 깍쟁이, ‘방 수사’가 되다

방유룡 신부는 1900년 3월 3일 당시 궁내부 주사로 영국 공사관의 통역관을 지내던 아버지 방경희(베드로)와 어머니 손유희(아녜스)의 육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 한학자였던 할아버지 방제원(프란치스코)은 제8대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와 만주 연길교구장이었던 브레허 주교에게 한문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방 신부의 삶에 순교정신이 깊이 새겨질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방제원의 신앙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해시대 수난을 직접 체험하고 순교자들을 직접 지켜 본 조부와 조모는 방 신부에게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방 신부의 누나인 고(故) 방순경(루시아)씨는 훗날 “집안에서 내려오는 박해 시대의 온갖 고초를 겪으며 훌륭하고 지혜롭게 이겨 낸 이야기와 신앙의 모범은 나에게 어떤 보물보다 귀했다”고 고백했다.

 

1917년,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한 방 신부는 장차 사제로서의 삶을 살고자 굳은 결심과 함께 인생의 전환을 맞게 된다.

신학생 시절, 방 신부의 별명은 ‘종로 깍쟁이’였다. 눈에 띄는 도시 소년이었던 그를 동창 고(故) 임충신(마티아) 신부는 이렇게 기억했다.

“여름방학 때면 그는 빳빳한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빳빳한 맥고모자를 쓰고 금테 안경 쓰고 귀또 구두를 신고 다녔습니다.

 

이런 차림은 그 시대에 일류 건달이나 했던 차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 레오는 신학교에서 쫓겨 나가거나 아니면 자진해서 나갈 사람이지 신부는 못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자유분방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와중에서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던 방 신부. 두 번째 방학을 보내고 달라진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온 그는 “오늘부터 나는 성인이 된다”고 말했다.

 

이후로 ‘종로 깍쟁이’에서 ‘방 수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방 신부는 내적 여정을 걸으며 자주 묵상과 관상 생활에 빠져있었다.

1930년 10월 26일 사제품을 받은 방 신부는 사목자의 길을 걷기도 전에 난관에 봉착했다. 일제의 압제와 폭정으로 제대로 사목활동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제의 감시는 종교시설까지 이어졌고 순사들이 모든 미사에 들어오고 신자들의 고해를 듣겠다고 고해실에 들어와 앉아있기도 했다. 사제들도 천황 숭배를 하지 않으면 즉시 경찰서로 불려갔고 자유롭게 외출하기 어려웠다.

방 신부는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고요히 칩거하거나 기도와 묵상, 명상과 같은 관상생활에 더욱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유를 빼앗긴 시절을 보내며 방 신부는 자신의 존재를 자아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여정을 걸었다. 돈과 권력, 관계로부터의 자유를 선택한 방 신부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통해 은총의 시간과 만나게 됐다.


1957년 5월 6일 방유룡 신부(맨 왼쪽)가 종신서원을 하고 있다.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제공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창립자 방유룡 신부가 서울 성북동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에서 대월기도를 하고 있다.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제공

 

■ 역사적 수난 속, 한국적 신앙 지키고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세우다

강원도 춘천본당(현 주교좌죽림동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황해도와 서울의 본당에서 사목했던 방 신부는 해주본당에서 세시리아 성가대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사도신경에 음을 붙인 악보를 직접 만들어 창의 형태로 신자들에게 성가를 가르쳤다.

 

우리말로 된 성가를 알려주며 방 신부는 신자들이 민족적 혼을 잊지 않도록 이끌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곧 6·25전쟁이 발발했다.

 

가회동본당에 부임한 지 1달 만에 전쟁을 맞은 방 신부는 신자들의 안전과 피난을 돕는 일에 몰두했다.

 

역사적인 수난들로 신자들의 신앙을 하나로 모으기 어려운 상황에서 방 신부가 시급하게 생각한 것은 교육이었다. 따라서 이후로 방 신부는 학교 설립과 수도성소 계발에 힘을 쏟았다.

신학생 초기 시절부터 수도자와 수도원에 대해 오랜 기간 탐구했던 방 신부는 외국에서 들어온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어울리는 수도 체계를 고심했다.

 

수도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유럽 신학과 수도 정신에 의존하는 양태에서 벗어나 한국 민족의 정신문화의 유산을 살려내길 원했다. 이러한 방 신부의 꿈은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를 통해 구현됐다.

1946년 4월 21일 설립된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는 한국의 순교자요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순교자들을 주보로 모셨다.

 

수녀회 창립식에서 “목적은 덕이요, 방법은 신덕이요, 도구는 빈주먹으로”라고 말했던 방 신부는 수녀회가 한국의 고유성과 독립적 정치성의 맥을 이어가는 수도회가 되길 염원했다.

방 신부는 면형무아(麵形無我)의 삶을 봉헌하는 영성을 수도회의 영성으로 삼았다. 면형무아는 밀떡의 형상, 즉 면형이 실체를 비우고 성체(聖體)가 되듯이, 성체와 같이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면형무아의 삶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점성(點性)과 침묵, 대월(對越)의 영성을 실천할 것을 가르쳤다.

점성은 가장 작으면서도 모든 것의 시작과 마침을 이루는 점처럼 자신을 낮추는 비움과 점처럼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지나치지 않는 겸손함을 말하며, 침묵은 하느님과 하나 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죽이는 순교를 말한다.

 

대월은 영혼이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의 현존 속에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면형무아를 바탕으로 수도자들에게 한국 민족 문화 발전에 공헌할 것과 한국 고유문화를 보존 연구하는 데 공헌할 것, 그리고 토착화된 한국 그리스도교 정신을 우리 민족에게 전할 것을 천명했다.

 

그래서 수도자들을 각자의 소질과 취미, 능력에 따라 미술, 음악, 국문학 등 각 부에서 연구시킬 것을 창설 이념에서 명시했다.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로 시작된 방 신부의 수도성소 계발은 이후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1953), 재속 복자회(1957년), 빨마 수녀회(1962)를 설립으로 이어졌고 수도자들은 본당과 해외선교, 사회복지기관, 교육기관 등에서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 성직자가 어두웠던 시대에 어렵게 켜놓은 등불은 지금을 사는 신앙인들이 순교자, 그리고 한국교회의 뿌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길을 밝히고 있다.


방유룡 신부 친필 ‘무아’.
책상에 앉아 집필하고 있는 방유룡 신부.

 

민경화 기자(가톨릭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