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옷깃을 여미면서 가슴 한편에서 떠오르는 임들이 있었다.
서울역 지하에서 추위를 견디고 계실 노숙인들과 어떻게 해서든 온기를 나누고자 국밥을 나르고 계실 수녀님들,
그리고 강정마을을 지키고 계시는 분들과 새벽같이 마을 입구로 나와 피켓을 드시는 소성리 할머니들,
새만금 수라갯벌 그 터를 살리고자 지금도 외치고 있는 활동가들, 삼척 맹방 해변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 있어도 밤차를 타고 올라가 매일같이 ‘탈석탄’을 외치고 있는 삼척의 임들,
부당한 구조에 대하여 저항하는 이 땅의 노동자들, 전쟁과 쿠데타로 배곯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임들,
환경부와 국회 앞으로까지 가서 들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임들, 금요일마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해 뭐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와서 피켓을 드는 임들,
크리스마스를 이벤트가 아니라 따뜻한 밥 한 끼로 꽁꽁 얼어붙은 마음 녹여주기 위해 쪽방촌을 찾는 임들이 떠올랐다.
강대국과 거대 기업과 높은 직책을 지닌 이들에게 닫힌 귀를 열고 제발 들어달라고, ‘여기, 사람이 있다’고, ‘여기, 아직 생명이 있다’고 삶으로 외치고 있다. 이분들은 소리 없는 지구의 울부짖음에 목소리가 되고, 확성기가 되고 있다.
하늘까지 오르는 이 울부짖음을 하느님께서 들으셨다. 하느님께서는 “나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라고 말씀하셨다. 단지 구약의 모세의 때에만 해당하는 하느님 말씀으로 듣는다면, 오늘 우리가 축하하고 있는 ‘성탄’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향해 내려오시는 그 육화의 의미를 모르고 그냥 건물과 가로수를 온통 화려한 전구로 장식하고 선물 주고받는 것이 성탄이라고 생각한다면, 믿는 이들로서 좀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그래도 세례받은 신앙인인데….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광화문 광장에 개연성 없는 인형들을 산만하게 꽂아 포토존이 되게 하여 그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바로 나 자신과 우리를 보는 것 같다.
‘국왕의 덕이 온 나라와 백성들을 비춘다’는 의미를 지닌 광화문 앞이 백성들이 와서 울부짖을 수 없도록 빼곡히 허상들을 가져다 놓았으니,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 나라의 전모와 우리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하다.
문득 내 방 기도상에 365일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나에게 희망으로 다가오는지 묻게 된다.
우리 시대에 하느님께서 정말 사람이 되어 오셨음을 참으로 믿는 이가 얼마나 될까? 곰곰이 되새기는 내 마음에 스치는 음성은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이는 이 성탄에서 구원의 희망을 볼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은 백성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니 오늘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우리끼리의 자축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길이 가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기쁨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기를 마다치 않으셨고, 오늘도 화려한 성당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진정 하느님은 오셨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삶의 곳곳에 이 하느님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그분의 자취를 발견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가던 길을 멈추고, 보던 자신의 시선을 멈추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을 때에 그분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게 될 때에, 인형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목동들은 주님 앞에 가까이와 경배드리고 있다. 자신의 가난함으로 오신 그분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노래하고 있다. 강정과 소성리, 삼척과 수라갯벌에서, 그리고 국회 앞에서 노래하고 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신비로부터 우리 모든 삶을 하느님의 자취 안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성탄!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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