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땐 성모님 치맛자락을 붙잡죠, 엄마 품에 안기는 마음으로”
93년 세례… 25년 넘게 성화 그려
아이 눈높이 맞춘 한국적 성모
‘우리의 엄마’ 같은 아늑함 느끼길
동글동글한 얼굴과 쪽진 머리에 고운 한복을 입은 성모님. 성모님께 안긴 색동옷 입은 아기 예수님과 천사들. 바라만 봐도 그림 속 노란 빛이 마음에 포근히 퍼질 것 같은 그림.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해 한국적 성화의 상징이 된 심순화(가타리나) 화백이 화폭에 담아내는 성모님은 어떤 분일까. 성모 성월을 맞아 심 화백을 당고개 순교 성지에서 만났다.
‘우리의 엄마’ 성모님의 따뜻한 품에 안기다
“성화를 그린지 벌써 25년이 넘었네요. 돌아보면 모든 날이 성모님과 함께한 신비로운 날들이었어요.”
심순화 화백은 어떤 신비의 순간을 체험했을까. 1993년 세례를 받고 2년여쯤 지나 꾼 꿈이 시작이었다.
“꿈속에서 누군가를 따라갔더니 성모상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성모님은 잊을 만하면 꿈에 나타나시더라고요. 저도 점점 꿈속에서 만날 성모님을 기다리게 됐어요.”
어느 날 심 화백은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듣다가 형용하기 어려운 고요함과 평화로움 속에 감싸였다. 성모님의 아름다운 영혼을 느낀 것만 같았다.
그때 처음 성모님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가장 아름다운 영혼으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계실 것 같은 성모님을.
성모님을 어떻게 그릴까? 동심화를 좋아하던 심 화백은 당시 ‘아이들’의 모습을 그렸고, 장애인 학교에서 그림을 그려주는 봉사를 했다.
“문득 성모님이 아이들 앞에 나타나신다고 생각해 보니, 이국적 모습이면 아이들이 낯설어할 것 같았어요. 친근감을 느낄 수 있게 ‘우리의 엄마’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어요.”
같이 바라보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표정과 옷차림도 아이들 눈높이에 맞췄다. 전래동화에 나올 것 같은 성모님은 그렇게 탄생했다.
“아이들을 생각해 그린 그림인데 어른들이 더 좋아하더라고요.(웃음)”
우리네 어머니 모습으로 성모님을 그려갈수록 심 화백도 성모님을 엄마처럼 느꼈다.
“힘들 때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마음으로 성모님의 치맛자락을 붙잡게 됐어요. 그분은 저의 가장 큰 위로자시죠. 제 작품을 보는 분들도 아늑한 성모님 품을 느끼길 바라요.
그 따뜻한 품에 폭 안겨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울고, 위로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심 화백은 스케치북이 없단다.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빈 캔버스에 곧바로 물감을 올린다. 그리려는 대상을 떠올리며 계속 묵상하고 상상할 뿐이다.
“스케치를 하며 ‘이거 해볼까’, ‘저거 해볼까’ 하는 건 제 의지가 반영되는 거잖아요. 하느님의 뜻대로 그리고 싶어요. 하느님이 주시는 영감, 그 떠오름을 그림 속에 집어넣다보면 그림에 대한 확신이 생기거든요.”
심 화백에게 그림은 곧 신앙이고 기도다. 그림을 내면에서 꺼내는 만큼 끝없이 하느님과 대화하기 때문. 그는 “제 안에 있는 것을 바라보려면 기도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며 “어둡고 부정적인 마음을 갖지 않으려 작품 활동 중에는 세상과 단절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어둠을 경계해서인지 그는 그림 대부분에 노란 배경을 사용한다. 빛과 희망을 표현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노란 빛 주위에 어두운 색도 함께 칠한다.
“그림은 곧 인생 같아요. 인생에는 꽃길만 있지 않고 가시밭길과 돌길도 있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어둠을 몰아낼 빛을 우리에게 주시죠. 그 희망의 빛을 저는 성모님의 삶을 통해서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그는 ‘평화의 성모님’을 자주 그린다. 혼란한 우리 세상에 성모님의 전구로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하는 뜻이다.
심 화백은 “성모님은 유독 많이 그려서 몇 점을 그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웃었다.
그중에서도 그는 프랑스 루르드성지에 걸린 작품을 특별하게 여겼다. 사연이 깊었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2002년, 루르드성지에서 심 화백에게 ‘한국의 성모님’ 작업을 부탁해 왔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알고…?’
이를 계기로 심 화백은 더 넓고 큰 캔버스를 마주했다. 많은 성당과 수도원에 그의 그림이 걸렸고, 개인전도 수없이 개최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그림을 봉정할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심 화백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한창 활발히 활동하던 2016년 벽면 그림 작업을 하던 중 떨어져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다. “그때 제 기도는 구걸이었어요. 하느님께 자비를 구걸했어요. 성모님께는 ‘부러진 몽당연필이 돼버린 제 손을 성모님이 잡아주시라’고 매일 호소했고요.”
기적처럼 치유되고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됐을 땐 잘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사라져 있었다. 빈 마음엔 겸손과 감사만 남았다. “그릴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행복했어요.
심 화백의 손에는 나사못 5개를 박은 상처가 남아 있다. 그는 “하느님이 감사와 겸손을 잊지 말라고 남겨주신 영광의 상처 같다”며 “다친 뒤로 오히려 작품활동에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흠뻑 빠져들게 됐다”고 했다.
그에게는 남은 소망이 있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을 가봤는데 수도자들의 방이 아주 작았어요.
심 화백은 작품활동의 원동력을 ‘설렘’이라고 했다. 그림을 통해 하느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설렘 말이다.
염지유 기자(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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