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달리타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성경을 읽어보면 됩니다
하느님 뜻 따르는 구약의 이스라엘
‘하느님 백성’의 참 모습 보여줘
시노달리타스 용어는 탈출기와 연관
이제 시노달리타스는 어느 정도 익숙한 용어가 되었고 시노달리타스의 중요한 특징들도 숙지된 것 같다. 시노달리타스는 무엇보다 구약성경의 핵심을 꿰뚫는 개념이다.
구약성경의 거의 모든 중요한 대목에서 우리는 시노달리타스에 대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구약성경은 시노달리타스의 기원과 특징을 잘 설명한다.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곧 하느님 백성은 무엇보다 하느님께 충실하며 하느님만을 섬기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하느님께 충실한 것은 곧 지금 여기에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뜻한다.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맥락에서 하느님의 뜻을 점차 깨달아 가며 이스라엘은 한층 더 높은 차원의 신앙 공동체로 형성되어 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느님 백성은 같은 길을 걷는 공동체요, 중재자와 함께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성장하는 공동체로 묘사된다.
결국 하느님 백성 안에는 상명하복의 일방적 군사문화도, 다수결의 민주주의도 결정적 원리가 될 수 없다. 오직 역사에 임하시는 하느님만이 기준이다.
창조
성경의 역사는 창조에서 시작되었다. 창조는 인간 공동체가 하느님과 함께 길을 가는 출발점이었다. 성경의 증언은 확실하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고립된 개인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친교의 표지 아래 그분과 협력하도록 부름받은 사회적 존재로 창조하셨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12항. 창세 1,26-28 참조)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창세 1,26) 사람을 창조하셨고, 세상 모든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로 창조하셨기에 인간은 처음부터 신적·인간적·자연적 관계와 공동체성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와 공동체를 떠나서는 어떤 인간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본질이 이렇기에 죄의 본질도 명확하다. 죄는 바로 이런 창조 때에 피조물에 새겨진 관계와 공동체성을 거스르는 것이고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죄는 하느님 계획의 실현을 위협하고, 창조의 진선미가 표현되는 질서 있는 관계망을 깨뜨리며, 인간의 마음 안에서 그의 소명을 흐리게”(12항) 한다. 결국 시노달리타스는 우리 인간의 존재 방식의 특성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가 실현되는 것은 창조의 본래적 질서에 접근하는 길이고, 시노달리타스에서 멀어지면 창조 질서와 소원해지는 것으로 새길 수 있다.
창세기의 조상들
창세기 선조들의 이야기에 하느님 백성의 특징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창세기의 대표적인 선조들, 곧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등은 한 번도 고립되거나 고독한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 밖의 작은 가정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은 작고 가난한 공동체와 언제나 동행해 주는 따뜻한 분이셨다. 창세기의 가정 공동체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했던 우리 하느님 백성의 원형을 보여준다.
창세기의 선조들은 하느님 명령에 따라 길을 나섰다. 아브라함은 우르라는 큰 도성에 머무르지 말고 가나안이라는 구석진 곳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함께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창세 12,1)
그는 한평생 자신의 가정 공동체와 함께 하느님이 제시하신 길을 갔던 사람이다. 그가 이끈 가정은 아내와 자식과 조카 롯 등 피붙이는 물론이요 종과 가축까지 포함하는 유목민의 무리였다.
가정 공동체이지만 다양성을 갖춘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우르에서 하란을 거쳐 낯선 가나안으로 오는 대장정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창세 12,4-5)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사악과 야곱 등이 이끈 공동체도 ‘함께 길을 가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본질이 같다.
창세기의 마지막은 다시 이 공동체가 길을 가는 것이다. 하느님은 기묘한 방법으로 막내 요셉을 통해서 이 공동체가 이집트로 들어가게 하셨다.(창세 38-50장)
우르에서 하느님의 명을 따라 함께 길을 나선 공동체는 역시 하느님의 명을 따라 다시 이집트 땅으로 함께 길을 떠났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들어간 낯선 땅 이집트에서 백성으로 불어났다.
이집트는 이들에게 중간에 거쳐 가는 곳일 뿐이었다. 그들은 시리아-팔레스티나가 아닌 낯선 땅을 함께 가는 도중에 그렇게 된 것이다.
하느님이 창세기 선조들과 맺어주신 계약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와 맺으신 것이 본질이다. 하느님은 이미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창세 17,10)임을 분명히 말씀해 주셨다.
하느님과 함께 길을 가는 공동체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공동체이니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복도 공동체에 미치는 것이 당연하다. 하느님은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창세 22,17)고 약속해 주셨다.
우리는 시노달리타스로 인해 아브라함의 가정 공동체가 지닌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공동체는 성 밖의 가난한 백성이었고, 이웃 백성들을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았지만, 오직 하느님의 명에 따라 함께 길을 나서는 신앙 공동체였고, 이웃과 대화하며 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탈출 사건
이집트 탈출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건이다. 탈출은 역사에 한 번 일어난 사건, 곧 일회적 사건에 그치지 않고 거대한 구세사의 물줄기가 터져 나오는 사건이다. 시노달리타스와 관련된 중요한 용어는 모두 이집트 탈출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탈출기의 히브리어 이름은 본디 ‘이름들’(שמות)이다.(탈출 1,1 참조) 그런데 그리스어 번역본인 칠십인역(LXX)은 이 책의 이름을 ‘나오는 길’ 또는 ‘탈출의 길’이라는 뜻의 ‘엑소도스’(εξοδος)라고 새롭게 붙였다.
칠십인역의 창의적 통찰은 이 사건의 핵심을 분명하고 쉽게 드러낸다. 탈출기는 본질적으로 이집트에서 나오는 길, 구원의 새로운 길을 드러내는 책이다.
이미 창세기에서 공동체로 함께 움직였던 백성은 당연히 이집트에서 나오는 길도 함께 했다. 그러므로 이집트에서 나오는 길은 백성이 ‘함께’(/쉰/ σύν-) 가는 ‘길’(/호도스/ όδός)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탈출(exodus)은 시노도스(synodos)이기도 하다. 이 말을 라틴어로 ‘콘칠리움’(concillium)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특히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께서 이 신비를 깊이 묵상하였다. 성인은 바로 이 점이 교회의 본질이요, 그리하여 교회의 이름이란 이렇게 ‘함께 가는 길’(σύνοδος)이라고 성찰하였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시노달리타스」 3항 참조).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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