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신심으로 이어졌던 신앙선조들의 엄격한 극기 실천
충청도 최초로 천주교 전파
금식과 금육 등 열심히 지키며
그리스도 수난 따르는 삶 살아
사순 시기는 주님 부활 대축일 전 40일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엄격히 단식하던 것을 본받아 자신의 희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40일 동안 단식과 금육을 통해 자신을 이기는 극기를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분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는 믿음. 200여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신앙선조들은 사순 시기에 철저한 재(齋·abstinentia)의 준수로 신앙을 단단히 다졌다.
■ 내포 지방 신앙 못자리, 여사울
충청남도 예산에 자리한 여사울은 충청도에서 최초로 천주교가 전파된 곳이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무한천과 삽교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이었던 여사울은 뱃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한 덕분에 천주교가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당시 아랫지방(청주, 홍주, 홍산, 대흥, 보령 등지)에서 서울로 가려면 여사울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을 건너가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마을은 예로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아 기와집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서울과 비슷해 ‘여(如)서울’이라 불렸던 것이 ‘여사울’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여사울을 대표하는 순교자는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다. 1759년 여사울의 양반집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1784년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동생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통해 입교했다.
가성직제도에 따라 이승훈(베드로)과 함께 신부로 활동했던 그는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1791년 신해박해 때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그는 한 차례 배교했다. 하지만 그 뒤 가책을 느껴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으로 이사해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크게 성장했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됐다.
조선대목구 제5대 대목구장이었던 성 다블뤼 주교는 “1850년 당시 한국천주교회 신자들의 반 이상이 이존창이 세례 준 사람들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84년 가을, 신례원본당은 구전을 토대로 이존창 생가터를 찾게 됐고 대전교구는 여사울 성지 개발에 힘을 쏟았다.
2008년 ‘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면서 성역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됐고 이곳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이 세워져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고난 묵상·실천
박해로 목숨이 위험한 와중에도 조선시대 신자들은 교리를 배우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제도 없고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성당도 없었지만, 신앙선조들은 첨례표를 만들어 생활 속에서 전례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던 신자들은 사순 시기면 단식을 하는 금식재(대재)와 육식을 하지 않는 금육재(소재)를 엄격하게 지켰고, 평상시에도 이를 따랐다.
신자들은 재일(齋日)이면 식음의 절제를 뜻하는 재를 지켰다. 여기에는 절식뿐 아니라 금육, 절주와 금주까지 포함됐다.
금식과 금육을 열심히 실천했던 모습은 그들이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는지 여부를 보고 천주교 신자임을 알아내 체포하는 경우가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1811년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에게 서한(신미년 서한)을 보내 금식재와 금육재 관면 요청을 교황에게 전하고자 했다.
신앙의 못자리라 불렸던 만큼 신심 깊은 신자들이 많이 살았던 여사울. 이곳에 살았던 복자 김광옥(안드레아)·김희성(프란치스코) 부자도 기도와 애긍생활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다고 전해진다.
부자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는 증거는 대재와 소재를 철저히 실천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여사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광옥은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다.
지방의 면장이자 사나운 성격으로 알려져 있던 그가 천주교에 입교했다는 소식에 놀랐던 이웃들. 날마다 교우들과 한자리에 모여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리고,
사순 시기마다 금식재를 지켰으며, 갖가지 극기 행위를 실천하는 김광옥의 모습을 보고 이웃들은 “그가 어린양같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포졸들에게 붙들려 모진 고문을 받았던 김광옥은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고 그해 8월 25일 순교했다.
김광옥의 아들 김희성은 아버지의 순교를 목격했지만, 그의 신앙 열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겠다며 신앙 의지를 다졌던 그는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김희성은 산속에 은거해 나무뿌리와 도토리로 연명했고, 사순 시기에는 엄격한 금식을 지켰다. 기도와 함께 여러 가지 극기를 실천했던 그는 이웃 신자들에게 어질고 순한 인물로 알려졌고 인내의 모범이 됐다.
1815년 을해박해로 옥에 갇힌 김희성은 1년 넘게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을 꺾지 않았다. 체포될 당시에도 웃는 낯으로 포졸들을 따라나섰으며, 옥중에서도 관원들이 놀랄 정도로 항구한 신앙을 보여줬다고 전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 그분께 더욱 가까이 가려고 했던 부자. 부와 명예를 버리고 극기와 고난을 택한 이들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시 한번 묵상하게 한다.
민경화 기자(가톨릭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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