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10월 23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 1회)

dariaofs 2015. 10. 23. 04:58

 

 

성 요한(Joannes)은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Abruzzo) 지방의 카피스트라노(또는 카페스타라노 Capestrano)에서 1386년 6월 24일에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전투에서 사망한 후 요한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다가 1406년 페루자(Perugia)로 가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1412년에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우스(Ladislaus)에 의해 페루자의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416년 페루자와 말라테스타(Malatesta)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평화를 제안하는 사절로 말라테스타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로로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당시 요한은 전쟁 직전에 산 발렌티노 백작의 딸과 결혼한 상태였으나 혼인이 완결된 상태는 아니었다. 브루파(Brufa) 감옥에 갇힌 그는 진지하게 영혼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자 수도자가 되고자 혼인에 대한 관면을 받고 1415년 10월 4일 페루자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오누프리우스 데 세자노(Onuphrius de Seggiano)의 지도를 받으며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 서원을 하고 시에나(Siena)의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5월 20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142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즉시 설교자로 나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수많은 이들이 개종하였고 또 수도생활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게 하였다.

 

또한 그는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누스와 함께 프란치스코회의 개혁을 위하여도 큰 활동을 하였고, 그들의 노력으로 여러 지파로 나눠져 있던 프란치스코회가 잠시나마 일치를 누리기도 했다(1430년). 성 요한은 1435-1436년에 교황특사로 활동했으며, 1436년 12월에는 그의 노력으로 작은 형제회 제3회 회원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1437년에는 페라라(Ferrara)의 '성녀 클라라의 가난한 자매 수도회'의 개혁을 도왔다. 1439년 말에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였고, 1440-1442년까지 밀라노(Milano)에서 설교와 저술 활동을 하였다. 1442년 말과 1443년에는 부르고뉴(Bourgogne)와 플랑드르(Flandre)를 방문하여 필리프 3세가 대립교황인 펠릭스 5세(Felix V)와 동맹을 맺지 않도록 설득하였다.

그는 바이에른(Bayern), 작센(Sachsen) 그리고 폴란드를 두루 다니며 설교하여 신앙을 크게 부흥시켰고, 이단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런 활동은 터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으로써 끝났다. 그는 이것으로 선교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십자군들에게 설교하러 다녔다.

 

그는 1456년 9월 1일 일록(Ilok)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 그에 대한 신자들의 공경이 곧 시작되어 1514년에 술모나(Sulmona) 교구 내에서 그에 대한 공경이 허락되었고, 1690년 10월 16일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요한에 대한 공경은 1880년에 보편 교회로 확산되었다.

 

강론   :   루카 12,54-59(15.10.23)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 12,57)

 

 시대의 중요성을 알아보는 사랑

‘세계화’의 시대에 우리의 일상은 전 지구적으로 긴밀한 상호작용을 미치며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기예보는 중요한 관심사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땅의 징조로 상징되는 일기예보는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에 정확한 날씨를 예측하려고 최첨단 장비까지 동원됩니다.

 

그런데 일기예보에 대한 관심으로 대변되는 세상에 대한 이해만큼 시대의 뜻과 중요성을 알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12,56-57)고 탄식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시대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기 전의 마지막 때임을 알아채지 못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눈을 뜨고 있었으나 매일 되풀이되는 삶 속에 안주하고 타성에 젖어 실은 잠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때가 가까이 다가옴에도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 군중들에게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12,57) 하고 물으십니다.

 

늘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두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깨어있지 않고 자신에게만 집중라면 결코 시대의 중요성과 올바른 일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시대의 중요성, 곧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요 사랑해야 할 때임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시대의 중요성을 참으로 안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선과 진리를 시대 안에서 볼 줄 알고 실제로 살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알기는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은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시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말씀과 행동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마는”(로마 7,19) ‘죄의 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분의 가르침은 그들의 삶을 뿌리째 뒤흔드는 위험한 도발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이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요, 그분의 시대가 바로 ‘마지막 때’임을 알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향유해온 것들과 바라는 것들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득권과 세상이 주는 달콤함에 젖어 있던 그들에게 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부인했을 것입니다.

나 역시 지금이 바로 사랑해야 할 때요 마지막 때임을 알아채지 못하고 ‘시대의 중요성’을 알아 살지 못하는 또 한 사람의 군중임을 봅니다.

 

영이 아닌 무의식과 습관에 따라 산다면 나 자신과 이 시대를 변화시키고 하느님의 뜻대로 재창조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다가오는 하느님의 뜻, 시대의 중요성을 알아차릴 때 우리 자신은 물론 사회도 변화될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 살아가든 사랑이신 주님 앞에 깨어 일치한다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취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뜻을 복음의 눈으로 읽어 온전히 그 뜻에 자신을 투신하여 자신과 교회와 세상을 쇄신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오늘도 현세에 대한 애착과 세상 근심 걱정을 버리고, 시대의 뜻이자 일상의 도전인 예수님과 프란치스코와 더불어 걸어가는 행복한 날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