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핵심·자기이해 131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34)나는 누구인가?

나를 알고 하느님을 알아가는 길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는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 안에 숨은 다른 질문이 있으니, 바로 ‘너희는’ 곧 예수님께서 말씀을 건네시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질문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신학자인 조셉 도레 대주교는 「모든 이를 위한 예수」(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8)에서 예수님께서 앞서 하신 질문의 초점을 ‘너희’에 맞추며,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자문하도록 질문을 던지고 계심을 일깨운다.(225~226쪽) 예수님을 따르는 나, 그분 앞에 선 나는 누구인가? 신앙의 길에서 하느님을 찾고 그분을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분을 찾아..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33)새로운 시작

죄를 없애시는 주님 앞에 매일 새롭게 어떤 자매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한다. “주여, 사흘마다 오소서!” 결심이 늘 ‘작심삼일’로 끝나기에, 사흘마다 오셔서 마음을 잡아달라는 간청이었다.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새해를 시작하며 가졌던 새로운 마음과 다짐들,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점검해 보면 어떨까. 중국 은나라 시조인 탕왕은 대야에 ‘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곧 “진실로 하루가 새로워지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는 문구를 새겨 넣어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어떻게 매일 새로워질 것인가? 새로워지는 것은 연말연시의 기분이나 분위기 혹은 한순간의 마음이나 의지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내가 새로워지지 않는데, 내가 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32)하느님을 찾고 자신을 찾는 이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자신을 찾는 이들이었습니다.”(「성탄」, 바오로딸, 2010, 109쪽)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한 성탄 강론에서 동방 박사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전형이다. 마태오 복음서가 기술한 그대로 그들이 실존한 인물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걸은 여정이 바로 우리 각자가 걷는 하느님을 찾는 영적 여정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별을 쫓아 길을 나섰다. 그들은 익숙하고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더 좋고 진실한 것을 찾기 위해 떠난 사람들, 하느님을 찾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길 위에서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여행길의 이정표인 별이 사라진 것이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31)놀라우신 하느님

저 위가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신 하느님 “신부님, 자녀를 신앙으로 잘 키우지 못해 냉담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죄고 짐이네요.” 많은 신자의 큰 고민거리 중 하나가 자녀들 신앙일 것이다. 자녀들이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고 할 때,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보라고 할 때, 어떻게 답해야 할까? 그들이 정말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일까? 혹시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상 속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아닐지?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 만들어놓은 하느님 상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신부님, 신앙 때문에 갈등이 많아요. 하느님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왜 자연재해나 대형 참사가 일어나도록 하느님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서, 혹시 우리의 바람대로 모든 것을 들어주는 ‘..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30)하느님과의 숨바꼭질

아기 예수 찾아내기와 가난한 마음 화려한 성탄 장식으로 물든 도시와 거리로 나선 수많은 인파, 성당과 교회에 모여 미사와 예배에 참여하며 축하를 나누는 신자들, 그리고 화려한 도시의 축제 그늘에서 외롭고 쓸쓸한 밤을 지내는 사람들, 어두운 길가에서 추운 겨울밤을 지새울 걱정을 하는 노숙인들…. 매년 성탄 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대조되는 풍경이다. 우리는 기쁜 얼굴로 서로에게 성탄을 축하하며 인사를 건네지만, 성탄의 깊은 의미는 헤아리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성탄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왜 성탄을 축하해야 하는가? 성탄은 모든 이의 축제다. 누구에게나 성탄이 축제인 이유는, 성탄이라는 소식이 우리 안에 늘 어떤 희망을 솟아오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희망이 아주 밝은 빛이든 저..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9)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느님께 소중하디 소중한 존재, 인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부모가 사랑스러운 자식을 일컬을 때 종종 쓰는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면 얼마나 사랑스럽다는 말인가! 성경에서도 그러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사 43,4) 공동번역 성경은 이를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라고 번역했다. 부모는 갓 태어난 아기를 두 팔로 받아 안으며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선물처럼 주어진 아기 앞에서 신비로움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어떻게 이런 아기가 나에게 태어났을까!’ 그러나 더욱 큰 신비는, 이 여리디여린 아기가 장차 부모와 대화를 나누고 친교를 이룰 인격적 주체로 성장한다는 ..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8)생명을 전달하는 기쁨

생명 전달과 신앙 전수의 장으로서 가정이 차지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설명하는 단어로, ‘제네러티비티(generativity, 생육성(生肉性)이라 번역)’가 있다. 이 단어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년 12월 개최된 교황청 문화평의회(현 문화교육부) 총회에서 사용한 신조어다. 총회에 참석한 프랑수아 부스케 몬시뇰에 따르면 생육성은 생명 전달의 네 단계를 포함하는데, ‘열망, 탄생, 돌봄, 포기’가 그것이다.(교황청 문화평의회, 「여성문화: 평등과 차이」, 92-109쪽) “생명을 갖고자 열망하고,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키며, 생명을 돌보고, 그 생명이 떠나도록 내버려 둔다.” 부스케 몬시뇰은 이 생명 전달의 네 단계에는 각각을 넘어서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그리스도 신앙은 거기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7)생명 전달의 장소인 가정

생명이 나고 자라고 이어지는 ‘가정’ 우리의 금쪽같은 신앙을 돌보고 자녀에게 전달하는 장소로서 가정은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한 성스러운 곳이다. 가정이야말로 육적인 생명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탄생하고 양육되며 전달되는 신비로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보편 교회는 제14차 세계주교시노드의 주제로 ‘교회와 현대 세계에서의 가정의 소명과 사명’을 택하였고, 전 세계 교회에 위기에 빠진 가정과 혼인의 중요성을 새롭게 일깨우고자 하였다. 주교시노드 후속 권고 「사랑의 기쁨」이 반포되었고, 2021년에는 반포 5주년을 맞아 ‘사랑의 기쁨인 가정의 해’를 보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와 교회 안의 가정 위기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교회 내에서도 가정 사목에 대한 관심은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6)생명을 전달하는 신앙

영원한 생명의 전달은 계속된다 지금 시대가 생명을 경시하고, 생명을 대상이자 도구로 대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보통 사람은 생명 앞에서 경외감, 압도감을 경험한다. 생명에는 놀라운 무언가가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오직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고밖에는 생명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갓 태어난 아기 앞에서 마치 자기들이 직접 만들어낸 작품처럼 의기양양할 부모가 있을까? 부모는 자기들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생명 전달의 놀라운 과정에 자기들이 속해 있음을 경험하며, 놀랍게 주어진 선물 앞에서 감격스러워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힘이며 존엄함이다. 누구도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생명은 인간의 손에 넣을 수 없고, 넣어서도 안 된다. 유전공학을 포함한 첨단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할지라도 인간..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25)유아세례와 신앙교육(2)

죄와 악에 맞서도록 도와주는 유아세례 교회는 오래전부터 유아세례를 행해왔다. 그런데 유아세례의 필요성과 의미에 대한 물음 역시 오래전부터 제기되었고, 오늘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교회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답해왔지만, 모든 이를 설득할만한 답을 찾기는 여전히 어려워 보인다. 유아세례가 야기하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원죄 교리와 상관한다. 아기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죄의 사함을 받는 세례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교회는 유아세례 때 아이에게 씻길 죄를 ‘원죄’라고 부르며, 그것이 ‘아담의 죄’에서 기인한다고 가르쳐 왔다. 현대 신학은 이를 아담이 지은 죄가 마법이나 바이러스와 같이 아기에게 전해진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인간이 태어나면서 죄 안에서 모든 인간과 연대하여 살게 되는 인간 조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