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을 찾 아 서 1335

[조민아 평화칼럼] 늦게 도착한 초대장

구세주의 탄생을 한 주간 앞둔 12월 18일,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교리선언문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을 발표해 사제가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동성 커플을 축복할 수 있다고 공식 승인했다. 성소수자들과 앨라이(ally: 지지자)들에게는 기나긴 기다림의 길목에 도착한 선물이다. 물론 동성 커플 축복이 성사가 아니며, 동성혼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달려있다.(11항) 그럼에도 프란치스코 교종은 교회가 교리나 규율에 묶인 채로 사목적 실천을 해서는 아니됨을 강조한다. 누구도 도덕적 완전성을 기준으로 누구에게 축복을 줄 것인지 평가하거나 배제하는 재판관이 될 수 없다.(12, 13, 32항)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초대하는 기회이기 때문이..

길 을 찾 아 서 2024.01.31

[시사진단] 도박중독 유병률과 청소년 문제행동

도박의 개념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우연(chance), 대가(consideration), 보상(prize)이다. 우연은 결과가 불확실한 사건을, 대가는 법률 용어로 결과가 불확실한 사건에 참여하기 위해 돈과 같은 가치 있는 물건을 내놓는 것을, 보상은 이겼을 때 가치 있는 것의 획득을 의미한다. 복권 구매는 그 결과가 불확실하고(우연), 복권 구매를 위해 돈을 내야 하며(대가), 복권에 당첨되면 상금을 받는다(보상). 따라서 복권 구매는 도박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도박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성인의 도박중독 유병률은 5%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는 2년마다 사행산업 이용실태 조사를 하는데 이 조사에 따르면, 도박중독 유병률은 2020년 5.3%, ..

길 을 찾 아 서 2024.01.30

[신앙단상] 나의 지구 나의 탈렌트

코로나로 쿼런틴(격리)을 시작했던 2020년, 작은 바이러스로 세상이 그렇게 빨리 바뀔 수 있음을 안타까이 실감하던 즈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손을 씻다가 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는 왜 이렇게 물을 많이 써요?” 그때 저는 수돗물을 콸콸 틀어 손을 씻는 중이었습니다. “너는 어떻게 씻는데?” 그랬더니 아이는 물을 쫄쫄 흘리며 “이렇게요. 이렇게 해도 잘 닦여요”하며 보여주었습니다. “God made the world.” 주일학교 첫날에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고 해마다 가르쳤습니다. 그런 제가 하느님께서 주신 환경을 위한다고 말만 하고 있었음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날부터 아이처럼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성..

길 을 찾 아 서 2024.01.29

[사도직 현장에서] ‘바쁜 것’과 ‘힘든 것’

농구 경기에서 벤치에 앉아있는 대기 선수를 ‘식스 멤버’라고 한다. 다섯 명의 출전 선수를 제외한, 언젠가는 경기에서 뛸 여섯 번째 선수라는 의미다. ‘식스 멤버’가 없다면, 주전 선수들은 최선을 다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경기 도중 다치거나 체력이 소진돼도 대체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감독·코치도 다양한 작전을 구상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도미니코 수도회 역사와는 달리 우리 공동체는 한국에 진출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회원 수가 많지 않고, 다양한 사도직을 구상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성직자·수도자가 공동체 사도직에서 편한 일만 골라 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지만, 적어도 고정된 사도직에서 개인의 탈렌트와 성향을 맞춰야 하는 고충은 덜한 면이 있다. 그래서..

길 을 찾 아 서 2024.01.28

[일요한담] 참 만남 / 최현정

상담사로서 새해를 열고 있습니다. 집단 상담을 중심으로 운영하고자 ‘여기, 지금, BEING’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개인 상담에 대한 문의도 종종 들어옵니다. 상담을 받아보겠다고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잘 알기에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동시에 내가 경험하지 못한 영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내담자에게 좋은 상담사가 되어줄 수 있을지 걱정과 두려움도 느낍니다. 상담 신청서를 받으면서 인상적으로 느낀 것은 개인 상담을 신청할 때 비대면 상담 요청이 부쩍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우리는 여러 가지 장면에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처리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야 했고, 뭔가 답답하고 충분치 않더라도 그런 비대면 상황에 익숙해져야 했죠. 우리는 적응의 동물..

길 을 찾 아 서 2024.01.27

[방주의 창]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황성철

청소년시절 아버지의 부재로 늘 허기지고 고달팠다. 성취에 대한 열망과 욕구가 누구보다 강했고 공부를 곧잘 했던 나는 현실을 이기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그래도 어느 것 하나 순조롭게 이룬 것이 없었다. 재수로 대학을 들어갔고 취업도 대학 졸업 후 4년 뒤에야 할 수 있었다. 입사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00m 경주 출발선에서부터 50m 뒤처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늘 두려움이 있었다.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불안이 숨어 있었다. 그 두려움을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로 달랬지만 나 자신까지 속이고 감출 수는 없었다. 중년이 되어 소위 잘나가던 때도 악몽을 꾸었다. 꿈속의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밥벌이 현장에서 고생하고 있거나, 시험 날이 다가왔는데 시험장을 찾지..

길 을 찾 아 서 2024.01.26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명동의 ‘파란 천막’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 입구 도로변에는 파란색 천막이 세워져 있다. 거기 걸린 현수막에는 ‘명동재개발2지구 강제집행 저지투쟁 농성장’, ‘가게는 삶이다. 폭력적인 강제집행 중단하라!’라는 글귀가 씌어 있다. 명동성당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맞은편에 보이는 좁은 골목과 작은 건물들. 땅값이 제일 비싸기로 손꼽히는 명동에 시골 읍내 분위기의 골목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랍다. 한때 ‘먹자골목’으로도 불리던 이곳 을지로2가 163-3번지 일대는 1983년에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지만, 명동에서 유일하게 재개발 되지 않은 구역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도시 정비’라는 이름의 재개발 광풍이 밀려왔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20년 이상 장사를 하다가 대책 없이 쫓겨나게 된 상가 세입자들이 문제였다. 그들 일부가..

길 을 찾 아 서 2024.01.25

[이소영 평화칼럼] 깜짝 선물

한 해의 마지막 밤을 봉사활동 함께하던 분들과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보낸 적 있다. 그 밤, 영성체 예식 중의 일이었다. 성체분배를 위해 뒤편으로 향하던 신부님께서 다시 앞으로 오시더니 평소와 달리 측면 첫 줄부터 성체를 나누어주셨다. 측랑의 앞줄에 앉아 있던 나도 서둘러 나갔다. 신부님이 손바닥에 얹어주신 조각은 뜻밖에 그것이었다. 성찬 전례 중 “내 몸이다” 할 때 들어 올려지는 크고 둥그런 성체를 사제의 손으로 쪼개어 나눈, 바로 그 조각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크림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먹은 꼬마처럼 들떴다.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 해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느라 혼났다. 큰 성체에서 나온 조각을 받아먹었다며 좋아하다니, 그건 첫영성체 앞둔 아이한테마저 놀림감이 될 법한 유치한 감정일 테니까. 기도..

길 을 찾 아 서 2024.01.24

[시사진단] 윤희의 축복

윤희는 남편과 이혼하고 고등학생 딸과 함께 살며 식당에서 일한다. 윤희는 뭐든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인 듯 뒤에 물러서 있고, 겉모습에서부터 외로움이 묻어나오는 사람이다. 20년 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에게 갑자기 날아온 편지를 몰래 뜯어본 딸에 이끌려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간다. 젊은 시절 윤희는 어쩔 수 없이 첫 사랑과 헤어지며 깊은 상처를 안에 묻고 살아왔다. 윤희가 사랑한 이는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일본 여성이었다. 상실과 체념으로 겹겹이 싸인 윤희의 얼굴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시리고 아픈 세월의 표정이었다. 딸이 엄마를 위로하려고 마련한 여행에서, 윤희는 자신의 모습과 과거를 다시 보게 되고, 딸도 엄마와의 새로운 만남으로 훌쩍 더 성장한다. 영화 ‘윤희에게’ 이야기다. 그..

길 을 찾 아 서 2024.01.23

[사도직 현장에서] 지상을 떠날 채비

사제의 신원을 두고 보면, 수도 공동체에서 맡겨진 개인 소임뿐만 아니라 수도원 밖 부르심을 받고 달려가는 일도 적지 않다. 사제라는 신원에서 오는 고유한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흔치 않게 일어난다. 여유가 있어 나지막한 수도원 뒷산을 산책하고 있는데, 노인 시설에서 일하는 수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르신 한 분이 갑자기 건강이 악화해 중환자실로 옮겼으니 급히 병자성사를 부탁한다는 전화였다. 다른 상황을 물어볼 생각도 못 하고, 집을 한참 벗어난 발걸음을 재촉해 준비해 나섰다. 예전엔 장례 미사를 가거나 아픈 이를 위해 집을 나설 때 ‘강론은 어떻게 할까, 무슨 말로 가족들을 위로할까?’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도 생활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고 ..

길 을 찾 아 서 2024.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