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을 찾 아 서 1335

[주간 시선] 딜레탕티슴(Dilettantisme)을 넘어서 / 이대로 신부

올 한 해 나에게 의미 있었던 일을 한 가지 선택하라면 매달 신문에 몇 문장 글을 남긴 것이다. 가볍게 읽어왔던 책에서 몇 가지 건져 올린 지식거리로 지면을 채워 갔던 시간들이다. 치열한 탐구 보단 즐기듯 주워 담은 지식의 파편들을 펼쳐왔기에 딜레탕티슴(이것저것 취미로 즐기는 태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퍼질러진 얕은 지식거리는 때론 인간관계에서 겸양을 놓쳐 자만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학문이나 예체능을 깊고 단단함 보단 얕고 허술하게 대해왔던 태도가 사목을 비롯한 내 삶의 전반적인 자세는 아닌지 경계한다. 몇 가지 지식거리에 의존하는 나의 일면은 마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등장하는 한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싯다르타’의 절친 ‘고빈다’라는 인물이다. 이들은 깨달음을 위해 함께..

길 을 찾 아 서 2023.12.25

[신앙인의 눈] 하느님, 땡큐! / 안봉환 신부

며칠 전 의사로 봉사하는 친구의 병원에 잠시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마디가 부어있는 손을 보더니 관절염 초기 증상이니 이제부터 조심스럽게 아껴 쓰란다. 어렸을 때 TV에서 들었던 퇴행성관절염 광고에 나오는 할아버지 대사가 문득 떠올랐다. “얘야~ 빨래 걷어라~!” 코로나19 상황이 정점으로 향하는 가운데 본당 소임을 맡게 됐다. 처음 원고 청탁을 받고 무척 당황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코로나19라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며 사목 체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문장 실력도 없는데 괜히 독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흐려놓지는 않을지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지면을 통해 모든 분께 ..

길 을 찾 아 서 2023.12.23

[현장 돋보기] ‘죽음의 행진’ 번 주교를 기억하며

또 코로나19에 걸렸다. 첫 감염 후 1년 9개월 만이다. 두 번째라 덜 아플 줄 알았는데 웬걸, 삭신이 쑤시고 목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조금만 움직여도 지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두통과 오한은 덤이다. 동네 병원에서 검사를 마치고 약을 처방받아 집에 돌아오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불현듯 한 생각이 들었다. ‘30대인 나도 코로나로 이렇게 힘든데, 60대 패트릭 번 주교님은 ‘죽음의 행진’을 하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1947년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한국에 파견된 패트릭 J. 번(Patrick J. Byrne, 1888~1950, 메리놀외방전교회) 주교. 그의 존재는 세계 최초로 교황청이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증거였다. 소임에 충실했던 번 주교는 1948년 유엔..

길 을 찾 아 서 2023.12.22

[조민아 평화칼럼] 대림절, 이행(移行)의 시기

저물고 떠오르는 시간의 경계, 대림절은 그런 시기다. 달력은 한 장이 남아 있는데, 전례력으로는 새해가 밝았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마음을 가다듬는 한편, 기다림 속에 지난 한 해를 돌아본다.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당연하다.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묶여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책과 후회는 나를 과거에 붙잡아두고, 새로 올 시간조차 과거의 바람에 맞춰 재단케 한다. 하지만 잘못한 것들만 이행(移行)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찬란했던 순간들이 오히려 더 질긴 올무가 되기도 한다. ‘그때는 좋았는데.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효력을 잃은 말들이 주문처럼 맴돈다. 대림절을 표현하기 적절한 단어가 떠오른다. 리미널리티(liminality). 임계성, 역차성, 사이성 등으로 번역..

길 을 찾 아 서 2023.12.20

[시사진단] 사람 아닌 사람, 장애인

지하철 혜화역에서 휠체어를 탄 이들이 줄지어 열차 안으로 들어온다. 승객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대고 어떤 이들은 고함을 친다. “이렇게 피해를 입혀야 되는 거야? 나쁜 ○○들,” “병신이 무슨 벼슬이냐!”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대표는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동료들을 향해 말한다. “그래, 우리는 병신입니다. 병신이라도 당당한 병신이길 원합니다.” 고 박종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버스를 타자!’(2002)에 나오는 2001년 3월의 시위 현장이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던 장애인이 사망했다. 이때부터 전장연은 ‘죽지 않고 이동하기 위해’ 시위를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2021년 12월, 이동권, 교육권, 노동권, 지역에..

길 을 찾 아 서 2023.12.19

[신앙인의 눈] 한국 사회에 하느님 법을 새기는 가톨릭 시민 / 이미영

한 달에 한 번 함께하는 ‘예여공(예수님과 여성을 공부하는 가톨릭 신자들)’ 모임에서, 지난달 간단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습니다. 호주 뉴캐슬대학교 연구진이 세계주교시노드 준비 과정에서 세계 가톨릭 여성의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가 올해 보고서로 나왔는데, 11월 모임에서 그 내용을 주제로 나누려다가 같은 설문 문항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진행해 본 것입니다. 국제조사는 총 104개국에서 1만7200여 명이 설문에 응답했지만, 그중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은 소수이고 대부분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여성들의 의견이 주로 반영된 결과라, 한국 여성 신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예여공 회원들을 대상으로 모임 전 2주 동안 간단하게 조사해 보려고 했는데, 설문 ..

길 을 찾 아 서 2023.12.18

[민족·화해·일치] 핵무기금지조약 / 강주석 신부

얼마 전 유엔 본부에서는 ‘핵무기금지조약(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 TPNW) 제2차 당사국 회의’가 열렸다. 유엔 주재 교황청 대표 가브리엘 카치아 대주교는 전체 토론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핵무기금지조약은 ‘핵무기 없는 세상’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상기시키고, 대화를 통해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조약의 조항들이 군축 윤리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적 접근은 ‘억지력의 위태로운 균형’에 기반한 안보의 소극적인 개념을 ‘우리를 하나로 묶는 형제애에 기초한’ 안보의 적극적인 개념으로 대체하는 ‘도덕적 혁명’을 가져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2021년 발효된 핵무기금지..

길 을 찾 아 서 2023.12.16

[조승현 신부의 사제의 눈] 사형집행 명령권자 한동훈

1994년 10월 6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에서 첫 사형집행이 이뤄졌다. 이날 하루 동안 15명의 사형수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음 해 11월에는 19명 사형집행을 했다.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시민단체들이 강하게 항의했지만, 문민정부는 멈추지 않았다. IMF 사태로 나라가 부도난 그 순간에도 사형집행을 했다. 1997년 12월 30일, 전두환·노태우 정권도 감히 하지 못한 23명 동시 사형집행이 이루어진다. 더욱이 이번 집행은 사형에 반대 신념을 가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였다. 물러나는 권력이 밀어붙인 것이다. 이후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쳐 이명박·박근혜 정부 동안 한 차례의 사형집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말할 것도 없다. 10년 이상..

길 을 찾 아 서 2023.12.15

[신앙단상] 누워서 하는 미사 어때요?

“안녕하세요? 일상이 바빠서 별 볼 일 없는 우리를 이곳 성이시돌목장까지 불러 별을 볼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110번째 별별 미사를 시작합니다.” 2021년 9월 코로나19 상황에서 제주교구는 제주를 찾은 육지(다른 교구) 신자들이 야외에서 거리두기를 하며 미사를 드릴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만든 별별 미사 찬양 봉사를 시작했다. 매주 토요일, 성이시돌목장 내 십자가의 길 12처에서 출발한 미사는 처음엔 5시 미사만 있었지만, 저녁 미사를 만들었으면 하는 신자들의 바람이 있었다. “저녁 8시 미사는 별을 보면서 하면 어떨까요?”라는 나의 황당한 제안에 교구장 문창우 주교님의 허락으로 시작된 삼뫼소 십자가 앞의 별별 미사. “별을 보려면 누워야 보이는데 누워서 하는 미사는 어떨까요?”라는 대책..

길 을 찾 아 서 2023.12.14

[시사진단] 생명철학과 생명 영성이 필요한 시대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과학ㆍ기술주의와 자본주의는 실증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물을 토대로 형성된 체계다. 흔히 자연주의로 부르는 이러한 철학적 관점은 지각 가능한 사물, 그러한 물질만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철학 위에서 물질적 실재를 해명하는 과학은 사물에 대한 객체적 지식을 독점하게 되었다. 이를 기술공학적으로 응용함으로써 현대인은 그 이전 어느 시대에도 보지 못한 삶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수많은 기술공학적 성과를 생각해보라. 그 정교함과 편리함에 실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철학은 또한 정치적이며 경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 작용한다. 자본주의가 거둔 경제적 성공은 우리 삶에 놀라운 풍요와 윤택함을 가져다주었다. 이 성공은 마침내 사회와 정치 체제가 ..

길 을 찾 아 서 2023.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