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을 찾 아 서 1335

[일요한담] 네가 얼마나 근사한지! / 정은귀

그 아이가 연구실 문을 똑똑 두드리며 내게 왔을 때 나는 화급한 학교 일을 처리하느라 매우 바빴다. ‘선생님, 지금 바쁘세요?’ 학생들이 면담을 원할 때는 미리 약속을 잡는 편인데, 그날 그 아이는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왔다. ‘00구나, 들어와. 어떻게 왔어?’ 그 학기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학기가 시작되면 학생들 이름부터 외우기에 다행히 아이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었다. 교실 뒤쪽에 조용히 있는 편이지만 친구가 있었고, 글이 섬세한 아이였다. 그 아이는 대뜸 ‘죽고 싶어서 왔어요’ 라고 말한다. 첫 마디 치고는 너무 세다. ‘왜? 무슨 일 있어?’ 놀라 되묻는 내게 아이는 차분히 고민을 꺼냈다. 자꾸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사랑을 하게 된다고. 남자가 좋다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꺼내 놓기도 ..

길 을 찾 아 서 2024.01.09

[현장에서] LED의 빛, 그리스도의 빛 / 이승훈 기자

올해 성탄 시즌도 상점과 거리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조명이 가득했다. 성탄의 조명은 밝은 만큼 그림자도 있다. 세계개발센터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해마다 크리스마스 조명에 쓰는 전력량이 시간당 66억3000만KW에 달한다고 한다. 다수 개발도상국의 사용량을 뛰어넘는다. 어떤 이는 LED를 쓰면 전력량이 크게 감축되니 괜찮다고 말한다. 그런데 LED의 빛이 능사는 아닌 듯하다. 최근에는 전기가 적게 드는 LED 덕분에 밤새 환하게 켜진 조명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밤새 켜진 조명은 나무의 생체시계를 망가뜨려 나무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늘린다고 한다. 어쩐지 이전에는 스위치마다 보던 ‘절전’ 문구도 이제는 드문드문하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혹시 ‘돈’이 적게 들기 때문에 더 많이 소비해도 괜찮다 생각하고 있..

길 을 찾 아 서 2024.01.08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정치·종교가 감동을 주지 못할 때

우리는 수많은 단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서로 다른 이익과 신념이 대립하고 세대와 문화, 정체성이 사람들을 나눈다. 편가르기와 진영 논리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사회 통합의 기능과 역할을 감당해야 할 정치와 종교가 그것을 제대로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키우기도 한다. 같은 목적으로 모인 정당 안에서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용인하지 못한다. 사랑을 설교하는 교회와 신자가 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며 혐오를 조장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혼자 있으면 외롭고 함께 있으면 괴롭다고 한다. 이제는 핵가족을 넘어 ‘핵가구’, ‘핵개인’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들에게 공동체는 그림의 떡이다. 아파트로 이사 간 친구는 옆집에 떡을 가져갔다가 “왜 주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주거 형태와 생활..

길 을 찾 아 서 2024.01.07

[방주의 창]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려면

1월 1일, 새해다. 새해라고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는 않지만, 이제까지 해 왔던 일들은 게으르지 않게 그리고 앞으로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은 신중하게 할 수 있기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며 기도하는 것이 새해의 첫 일과다. 작년, 첫 주임 소임을 맡아 동두천본당 공동체에 오던 날이 떠오른다. ‘6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지닌 본당에서 이제 겨우 7년차인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 반, ‘본당 역사가 탄탄하니 열심히만 하면 많이 배울 수 있을 거야!’ 하는 기대 반. 결론만 말하자면, 동두천본당 공동체에서 보낸 지난 1년은 ‘주는 것은 없이 받기만 하여 송구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오랜 시간 알아온 서로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요즘..

길 을 찾 아 서 2024.01.06

[시사진단] 사람들은 자신과 돈만 사랑하고 하느님을 무시한다

“사람들은 자신과 돈만 사랑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하느님을 무시하여”(2티모 3,2),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정부는 올해 감사원과 국무조정실의 전력산업기반 지원기금 사업 점검 결과, 태양광사업의 금융지원사업에서 과다대출, 불법 태양광설치사업의 승인, 연구개발비 남용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이 사업 점검을 담당한 박구연 국무1차장은 “태양광사업은 향후 더 확대되어야 하므로 건전한 발전사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으나, 산업통상자원부는 문제점을 보완하는 정책이 아닌, 2024년 신재생에너지 지원 예산안을 2023년보다 42.3% 감축하여 국회에 상정했다. 이는 2023년 보고한 ‘제10차 전력수급..

길 을 찾 아 서 2024.01.05

[신앙단상] 청년이 숨쉴 수 있기를

제주교구 가톨릭청년머뭄터 '혼숨' . 제주교구 서귀포성당 가나안공소를 개조해 만든 가톨릭 청년머뭄터 ‘혼숨’ 축복식이 11월 9일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 주례로 거행됐다. 11월 9일, 제주교구 가톨릭청년머뭄터 ‘혼숨’의 축복식이 있었다. 교구장 문창우 주교님 주례로 진행된 축복식에는 많은 신부님과 신자들이 함께해주었다. 제주의 해녀들이 잠수 뒤에 해면으로 올라와 첫 숨을 쉬면서 내는 소리를 ‘숨비소리’라고 한다. ‘혼숨’은 하느님의 숨결, 큰 숨결을 의미한다. 무한경쟁 속 하루하루 전쟁과 같은 삶을 살면서 숨 쉬는 것조차 힘겨운 청년들이 잠시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첫 숨결을 찾고, 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지난해 가을, 이시돌 피정에서 한 청년과의 만남이 혼숨이 생기는 계기가..

길 을 찾 아 서 2024.01.03

[서종빈 평화칼럼] 앞모습과 뒷모습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 연말연시가 다가왔다. 새로운 기대와 설렘으로 송구영신을 꿈꾼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 대한 실낱같은 기대, 저성장을 탈출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경제, 저출생의 인구절벽과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다. 현실은 각박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변화와 혁신에는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기성세대는 허탈함에, 신세대는 암울함에 고개를 떨군다. 사회 곳곳에서 세대교체의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다. 1970~1980년대생이 중역의 자리에 오른다. 내년 갑진년(甲辰年)은 베이비붐 세대(1950~1964년생)의 막내 격인 1964년생이 환갑을 맞는다. 현역에서 공식 은퇴한다. 뒷모습이 쓸쓸하다. 연..

길 을 찾 아 서 2024.01.01

[민족·화해·일치] 기다림의 자세 / 박천조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 이맘때면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연인 간의 기다림도 이러할진대 주님을 기다린다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할까. 과연 말씀에 따라 묵상하며 고민하고 실천하는 기다림을 하고는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가톨릭신문에 글을 쓰면서 ‘민족, 화해, 일치’ 각각의 의미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셈법과 인간의 셈법이 다르고 하느님의 시선과 인간의 시선이 다르며 하느님의 질서..

길 을 찾 아 서 2023.12.30

[신앙인의 눈] 우주를 대하는 신앙인 / 고계연

“소행성은 태양계 기원과 진화의 비밀을 풀 열쇠”, “시간의 역사 속에 던져진 고(古)천문학”, “아는 만큼 보이는 과학”, “천문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의 벅참”, “핫하고 신나는 뉴스로 가득 찬 우주”, “사건 지평선 너머로 빨려 들어가는 모든 물질”, “열정을 소문내고픈 천문학자들”, “상상력을 자극하는 우주 거대 구조.” 짧은 문구들이지만 지적 호기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하다. 필자가 최근 탐독한 「90일 밤의 우주」에 실린 젊은 천문학자 8인의 한 마디다.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같은 과학적 도구가 천체 물리학자들에게 새로운 발견의 가능성을 준다. 우리 눈앞에서 우주가 어떻게 계속 확장하고 변화하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광활한 우주, 지금까지 확인된 은하와 별, 행성의 무수함에 놀란다..

길 을 찾 아 서 2023.12.28

[시사진단] 알코올 정책, 전반적 평가 필요

벌써 12월 초이니 2023년과 헤어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매년 이맘때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과 만나 회포를 풀곤 한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게 술이다. 술은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하지만, 과도한 음주는 모임의 분위기를 해치는 것은 물론 음주운전 등 각종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최근 5년간 전체 교통사고의 약 8%가 음주운전 사고로, 교통사고 10건 중 약 1건은 음주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음주, 음주 관련 사고의 예방을 위해 개인이 절주나 금주하는 노력도 기울여야겠지만 효과성 높은 알코올 정책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책은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주류 가격 정책이 음주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듯이 국가의 알코올 정책을 평가하..

길 을 찾 아 서 2023.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