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주의 탄생을 한 주간 앞둔 12월 18일,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교리선언문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을 발표해 사제가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동성 커플을 축복할 수 있다고 공식 승인했다.
성소수자들과 앨라이(ally: 지지자)들에게는 기나긴 기다림의 길목에 도착한 선물이다. 물론 동성 커플 축복이 성사가 아니며, 동성혼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달려있다.(11항)
그럼에도 프란치스코 교종은 교회가 교리나 규율에 묶인 채로 사목적 실천을 해서는 아니됨을 강조한다.
누구도 도덕적 완전성을 기준으로 누구에게 축복을 줄 것인지 평가하거나 배제하는 재판관이 될 수 없다.(12, 13, 32항)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초대하는 기회이기 때문이다.(44항)
우려의 목소리와 혼란이 있는 줄로 안다. 불과 2년 전 교황청 신앙교리부에서 “교회는 죄를 축복할 수 없기에” 동성 커플의 축복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교회의 입장을 번복한 획기적 변화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새 문서의 어떤 내용도 혼인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결합이라 가르치는 교리와 신학적 견해를 바꾸지 않는다. 변화가 있다면 성소수자들에 대한 교회의 태도이지만, 이는 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교종은 오히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확인하고 있다. “교회가 항상 모든 이를 환영하고 사랑하며, 용서를 체험하는 자비와 희망의 장소가 되게 하자”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일관된다.
이에 기반하여 하느님은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하며 모두와 함께하신다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순수한 원칙을 수호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지체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여 그 뜻에 따르고자 하는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 정신을 실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듯 시대의 요청 속에서 사랑의 자리를 분명히 밝히며 함께 걸어가야 할 여정의 이정표를 찾는다는 점에서 교회의 전통을 계승하고 공동체성을 확장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당신의 만찬상으로 초대하신다. 모든 죄인들을 먹이기 위해 스스로 생명의 양식이 되어 마련하신 식탁이다. 한참 늦게 초대장을 전달받은 이들이 이제 조심스레 잔칫집 문을 두드린다.
혹여 이들이 예수님의 식탁에 앉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과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인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이 추운 겨울, 이웃들을 여전히 잔칫집 문밖에 세워 둔 채 ‘너희는 우리와 다르다’는 말로 그들의 초대장을 따져보며 자격을 묻지 않도록 하자. 죄인이란 이름표를 붙여 식탁 끝자리로 몰아버리지도 말자.
오랫동안 문전박대를 당해왔던 자매형제들을 맞기 위해 버선발로 뛰어가 따뜻이 방 안으로 맞아들이는 제자의 모습은 어떨까?
늦게 도착한 만큼 예수님 옆자리를 내어주어 그분 가까이에서 함께 빵을 떼고 잔을 기울이는 기쁨을 맛보게 한다면 좋지 않을까?
말하기조차 힘들었을 오랜 기다림의 세월, 날 선 눈길과 무심한 말 때문에 상처받고 곪았을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사과하고,
그 아픈 시간의 이야기를 청하여 듣고,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먼저 초대장을 받아 안은 이들에게 기대한다면, 너무 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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