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정통 사마리아인은 700여 명에 불과하며 대부분은 신도시 '나블루스'에 살고 있다. 한때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마리아인이 이렇듯 초라한 숫자로 남은 것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나블루스는 아랍인들이 붙인 이름이고 원래 이름은 '스켐'이었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이 요셉의 유골을 안치한 곳이며(여호 24.32) 여호수아가 선종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스켐은 북이스라엘의 수도였고(1열왕 12.25) 이런 이유로 이 지역을 사마리아 지방이라 불렀다.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스켐의 주민들을 잡아 갔다. 그리고는 이방인들을 이곳에 이주시켰다. 남은 자들은 추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들과 혼인할 수 밖ㅇ[ 없었다. 이후 남쪽 지파들은 스켐이 속한 사마리아를 '이방인의 땅'으로 취급했다.
사마리아인들은 반발했지만 바빌론 포로생활을 거치면서 기정사실화되었다. 더욱이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사마리아 쪽의 참여는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이렇게 되자 적대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후 사마리아인들은 스켐 외곽의 그리짐 산에 제단을 쌓고 단독으로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 또한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였다. 남쪽 유다인들이 볼 때 명백한 이단이었다.
그런 이유로 기원전 100년경 마카베오 가문의 '요한 히르카누스'는 군대를 동원해 그라짐 산 예배소를 파괴했다. 사마리아인들는 극력하게 저항했고 남쪽 유다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모마시대 총독 '빌라도'는 이들을 확실하다가 총독에서 파면되었던 것이다.
스켐 인근에는 '시카르'라는 곳이 있는데 야곱의 우물은 여기에 있다. 야곱이 열두 아들을 위해 파놓으 것이라고 전해지는 우물이다.
직경은 7.5m 깊이는 50m에 달한다고 한다. 요한복음 4장의 예수님께서는 바오 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던 것이다.
옛날부터 이고 사람들은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해 오고 있었는데 맛도 없고 때로는 냄새도 나기에 야곱의 우물은 글자 그대로 생명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사마리아인들은 대체로 빈곤하며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근친혼으로 맺어지기에 정신적으로도 병약하다고 한다. 지금도 매년 양을 잡아 그리짐 산에서 제사를 지내며 파스카 예절은 구약시대 예절을 정확하게 재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신은근 바오로 신부 -
※ 참고 자료
그리심 산과 아벨 산이 있고 그 사이에 세겜이 있다. 세겜은 히브리어로 목덜미란 뜻으로 양 옆으로 어깨처럼 두 산지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전통적인 우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야곱의 우물이다.
구약성경에는 언급이 없지만 요한복음은 야곱이 자기 후손을 위하여 파 놓은 우물로 야곱과 그의 가족이 마신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요 4:12). 그리고 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주시리라 말씀하셨다.
야곱의 우물은 깊이가 약 50m나 되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계속 솟아나는 샘이다.
이곳에 주후 380년 처음으로 야곱의 우물 교회가 세워졌다. 그 후 1187년 십자군에 의해서도 교회가 세워졌었고 이 기초위에 1908년 러시아정교회가 현재의 교회건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후 그리스 정교회에서 공사를 인수해 재개 되었으나 재정난으로 지붕 없는 미완의 교회가 되었다. 90여년이 지난 1995년 공사를 다시 시작해 2005년 현재의 교회로 완성되었다. 교회건축 시작 100여년 만이다.
1979년 야곱의 우물 교회 신부님이 한 이스라엘 정착민에 의해 도끼로 잔인하게 살해된 슬픈 역사도 가지고 있다.
유대인의 조상 야곱의 우물을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이후 우물을 사진 찍는 것을 절대 금지하고 있다. 혹시 유대인이 사진을 보면 또다시 자극될지 모를 우려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