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5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dariaofs 2015. 12. 14. 07:10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은 1542년 6월 24일 에스파냐의 아빌라(Avila) 근교 폰티베로스(Fontiveros)에서 직조공이었던 곤살로 데 예페스(Gonzalo de Yepes)와 카탈리나(Catalina Alvarez) 사이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극심한 빈곤과 궁핍 속에서 생활하였고 아버지와 형 루이스(Luis)는 요한이 어릴 때 사망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어머니와 함께 메디나 델 캄포(Medina del Campo)에 정착해 살며 교육을 받았고, 17세 때에는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메디나 병원장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1563년 그는 메디나 델 캄포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이듬해에 성 마티아의 요한(Juan de Santo Matia)이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하였다. 1564년부터 4년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6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한은 고향집을 찾았을 때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를 만났다.

 

그 당시 카르멜회의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해 더 고적하고 깊은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카르투지오회로 옮기고 싶다는 뜻을 성 요한이 피력하자, 성녀 테레사는 그를 설득하여 카르멜회에 남아 함께 개혁운동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1568년 11월 28일에 그는 두루엘로(Duruelo)에서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도움으로 개혁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성 요한은 카르멜회의 최초 규칙으로 돌아가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하였으며, 이때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바꾸었다. 그는 열렬한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면서 인근 마을들에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년 뒤 두루엘로에 최초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보급을 위하여 진력을 다하던 중, 1577년 10월 2일 수도회 개혁을 반대하던 완화 카르멜회 수도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톨레도(Toledo)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578년 8월까지 9개월간 ‘어두운 밤’을 체험하였다. 이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신비적, 영성적, 문학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감옥 안에서 그는 몇 편의 시를 썼다. 9개월 만에 감옥에서 탈출한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여러 직책을 맡아 활동하는 한편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1579년 맨발의 카르멜회는 인정을 받았고 수도원도 세웠다. 그는 바에사에 개혁 카르멜회 대학을 세우고 학장이 되었으며, 1582년에는 그라나다(Granada)의 로스 마르티레스 수도원의 원장을, 1585년에는 안달루시아(Andalucia) 관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1590년 카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요한은 1591년 6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병에 걸려 그대로 에스파냐에 남게 된 그는 그 해 9월 말 우베다(Ubeda) 수도원으로 옮긴 후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은 후 12월 13일 밤 자정이 지난 무렵에 사망하였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중 한 명이며, 그의 저서들은 가장 유명한 영성신학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카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 등이 가장 유명하다. 요한은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에스파냐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강론   :   마태 21,23-27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마태 21,25)

The authority of Jesus questioned
 

행복으로 이끄는 사랑의 권한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메시아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병자를 치유하고 가르치며 누가 그런 권한을 주었느냐고 따집니다(마태 21,23).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리시고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21,25)고 되묻자 그들은 ‘모르겠소’ 하고 답변합니다(21,25-27).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의 사랑의 권위를 부인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이 쌓아온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했고 자신들의 기반인 제도에 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그들에게는 두려운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피하면서 자신들의 안위만 걱정했습니다.

먹힐 살(肉)로 오실 하느님의 탄생이 가까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밥이 되시기 위해 강생하신 사랑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키우고 살리는 사랑의 권한이며 생명의 힘입니다.

 

인간의 모든 권한과 살아갈 힘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며 그 본질은 사랑의 힘입니다. 그분은 힘없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올 한해 동안 나는 무엇으로 살아왔는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아니라 내 뜻과 힘에 따라 내 방식대로 살려 했던 순간들이 있었겠지요?

 

나의 능력, 재물, 사회적 지위, 쌓아온 경력, 자존심, 학연이나 지연과 같은 인맥 이런 것들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영원한 행복을 보장해줄 수는 없습니다.

영성생활은 내 힘과 의지, 인간으로부터 받은 자격이나 권한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사랑의 소명을 살아가는 것임을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많은 경우 그 길은 불안하고 불확실하며 고통이 뒤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는 이 길 밖에 없음을 잘 알지 않습니까? 이제 그렇게 움직여야겠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강조했듯이 십자가는 부활로 인도하고, 고통은 황홀로, 어둠은 빛으로, 포기는 소유로, 자기부정은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끌어갑니다.

 

그렇듯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거룩한 모순 속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돈, 권력, 지식과 정보, 능력에 매달리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고 부드러워지고 약해져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해질 때 오히려 강해지며, 반대로 내 뜻과 힘이 강할수록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세상일로 바쁜 세모(歲暮)이지만 그래도 멈추어 주변의 어렵고 힘들고 소외된 이들, 특히 억울함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가가 따뜻한 손을 내밀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힘을 사랑으로 되돌리는 아름다운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하고 고통받는 이들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