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1월 2일 다해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dariaofs 2016. 1. 2. 04:12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또는 바실리오)는 부유하고 이름 있는 그리스도교 집안 출신으로, 교회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문 중의 하나이다.

 

그의 할머니는 마크리나(Macrina, 1월 14일), 그의 부친은 바실리우스(5월 30일), 그의 모친은 엠멜리아(Emmelia, 5월 30일), 그의 큰 누이는 마크리나(7월 19일), 그리고 두 동생은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와 세바스테(Sebaste)의 베드로(Petrus, 1월 9일)인데, 모두가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다.

그는 카이사레아(Caesarea),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그리고 아테네(Athenae)의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며, 이곳에서 나지안주스(Nazianzus)의 그레고리우스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357년경에 그는 동방의 주요 수도원들을 방문하였으며, 3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의 이리스(Iris) 강변의 안네시에서 은수자로 정착하였다.

 

바실리우스는 불과 5년 동안을 그의 공동체와 생활했을 뿐인데도 동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는 달리 법 제정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정교회 수도생활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주요한 원리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사제로 서품된 후 성 바실리우스는 365년부터 카이사레아 교구를 위하여 일했고, 370년에는 그곳의 주교로 선임되었다. 그는 또 아리우스파(Arianism) 황제인 발렌스(Valens)가 정통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용감히 맞서 싸웠다.

 

이 때문에 그는 지방 총독 앞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명하여야 했다. 바실리우스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였기 때문에 총독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당신 같은 주교는 일찍이 본적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대화를 보더라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의 강직성 때문에 교황 성 다마수스(Damasus)와 서방 교회간의 관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는 병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하는데 매우 적극적이었고, 요양원을 짓거나 혹은 대대적으로 진료사업을 펼쳤으며 설교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아리우스파(Arianism)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방 정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발렌스 황제가 전투에서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인 1월 1일 카이사레아에서 사망하였다.

바실리우스는 초대 교회의 큰 거인이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아리우스파를 몰아낸 것이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를 단죄한 배경에는 바실리우스의 영향력이 대단히 컸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네오카이사레아에서 제정한 규칙과 조직이 동방 수도생활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전통이 이어져 온다. 또한 바실리우스는 성직매매를 완강히 거절하였으며, 가뭄과 한발의 희생자를 대대적으로 원조하였으며,

 

보다 훌륭한 성직자 양성을 도모하였고, 엄격한 성직자 법규를 주장하고, 과감하게 악습을 끊어버리면서,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만연된 매춘행위 관계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는 유식하고 정치력도 있는 사람이면서 성덕이 뛰어났으며,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의 해박한 저서들과 4백여 통의 편지들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성령에 관한 저서와 에우노미우스를 반박하는 세 권의 저서 그리고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주스와 함께 편집한 “필로칼리아”가 그 중에서도 유명하다. 그는 교회학자이며 동방 수도자의 아버지로 큰 공경을 받는다.

 

 

 

 

나지안주스의 주교로 45년간 봉직했던 성 그레고리우스(1월 1일)와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의 아들로 태어난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나지안주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파도키아의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공부하던 중에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를 만났고, 그 후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 수사학교를 다녔으며, 아테네(Athenae)에서도 10여 년을 성 바실리우스(Basilius)와 미래의 황제 율리아누스 배교자와 함께 공부하였다.

 

30세 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즉시 바실리우스와 함께 이리스 강변에서 은수생활을 하다가 2년 후부터 부친을 돕던 중, 362년에 사제로 서품되고, 372년경에는 사시마의 주교로 임명받았다.

이 교구는 아리우스(Arius) 지역이었으므로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교로 축성은 되었으나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발렌스 황제가 죽고 정통교회에 대한 박해가 수그러들게 될 때, 일단의 주교들이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초청하여 아리우스파(Arianism) 지역에서 정통교회의 활성화를 도모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아나스타시아(Anastasia)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하여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이때 그는 아리우스파인 막시무스(Maximus)와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고, 388년에는 새로 입교한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의 가르침을 정통교리로 인정하고 아리우스파 지도자를 축출하는 칙서를 발표케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의 임명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켜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Council of Constantinople)까지 열려 문제가 심상치 않게 발전하므로, 그는 교회 내의 평화를 위하여 주교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다가 고향 땅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정통교회의 수호에 큰 공적을 남겼고, 또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의 선언문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교회학자’로 불린다.

 

 

                                                                 강론 :  (요한 1,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라는 말은,
"나는 다만 물로 세례를 베풀 따름이다(공동번역)." 라는 말인데,
이 말은, 예수님의 '성령의 세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보다 예수님께서 하시게 될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라는 말은,
"너희는 아직 모르고 있지만, 그분은(메시아는) 이미 너희 가운데에 오셨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에는, "메시아께서 이미 오셨으니 너희는 그분을 알아보아야 하고,
믿어야 한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라는 말은
"그분은 나보다 더 높으신 분이고, 나보다 더 중요한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중요한 인물이 길을 갈 때,
수행원은 앞에서 가고 그 중요한 인물은 뒤에서 가는 상황에서 온 표현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은,
"나는 그분의 종보다 못한(낮은) 존재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요한이 자기의 역할과 직분을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는 '겸손'과 '비굴'을 구분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위치를 바르게 알고,
그 위치에 제대로 서는 일입니다.
'비굴'은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도 용기가 없고 비겁해서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위치보다 더 낮은 쪽으로 내려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정말로 그렇게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을 정도로 낮은 사람이었을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한다면, "그렇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고,
하느님이셨던 분"입니다(요한 1,1-2).
그리고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는" 그런 분입니다(요한 1,3).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피조물인 한 인간일 뿐입니다.
(요한뿐만 아니라 어떤 예언자라도 다 마찬가지이고, 우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는 요한의 말은,
'비굴'하게 자신을 낮춘 일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표현한 '겸손'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꼭 필요했나?
만일에 요한의 증언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수 없었나?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뭔가가 꼭 필요하다면, 전능하신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부르셔서 그런 일을 맡기신 것은,
하느님 쪽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아마도 사람들이 좀 더 쉽게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
즉 사랑과 자비일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필요한가?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요한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지 않은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그가 떠난 뒤에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라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안드레아는(요한 1,35-39)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41).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안드레아를 통해서 베드로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성령 강림 후에 본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사도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사도 2,36).
그렇게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사도들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각 신앙인들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증언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1요한 2,28)."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라는 말은,
'삶으로' 실천하는 신앙생활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는 '재림과 심판 때'이고,
"확신"은 구원에 대한 확신(보증)입니다.
"부끄러운 일"은 신앙인이면서도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 1서 저자의 말을 '증언'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언하는 일은 말로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온 삶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다." 라는 말은,
단순히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증언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온 삶으로'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나도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온 삶으로' 예수님을 증언한 신앙인들은
반드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