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국왕 가시미로 4세와 독일의 황제 알베르트 2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난 13명의 자녀 가운데 3번째인 성 카시미루스(Casimirus, 또는 가시미로)는 크라쿠프(Krakow)의 궁성에서 태어나 요한 들루고즈(Joannes Dlugosz) 신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성스럽고 엄격한 생활 그리고 사랑이 충만한 생활을 원하였다.
그는 정당하지 못하다는 어떤 확신에 따라 그의 부친과 헝가리 귀족들이 요구하는 헝가리의 국왕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의 축출 공작에 군대를 인솔하는 직책을 거부하였다. 그는 이 결심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또한 그는 부친이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노력을 일축하고 학문과 기도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그의 부친이 폴란드를 떠났던 1479-1483년까지 부왕 노릇을 하였으며, 리투아니아(Lithuania)를 방문하는 길에 그로드노(Grodno) 궁성에서 운명하였다.
빌나(Vilna,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Vilnius)의 주교좌 성당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는 수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는 1522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Hadrianus V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성인이다.
강론 : (마르 12,28ㄴ-34)
<사랑>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는데(마르 12,28),
이 질문은 "꼭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에는 "중요한 계명은 꼭 지키고, 덜 중요한 계명은 안 지켜도 되지
않을까?"
라는 속셈이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율법학자가 그런
의도로 질문한 것이라면,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답변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중요한 계명과
덜 중요한 계명으로 분류할 수 없고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예수님의 말씀에서 '첫째,
둘째' 라는 말은 '중요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근본정신'을 뜻하는 말입니다.
(율법학자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근본정신'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묻지 마라. 모든 계명은 다 똑같다.
그리고 계명의 근본정신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으로
계명을 실천하여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을 첫째로, '이웃 사랑'을 둘째로 구분하시면서도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두 사랑은 똑같이 계명의
근본정신이고, 두 사랑은 사실상 하나라고 강조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음, 목숨, 정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씀을
간단하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원래 사랑이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는 일입니다.
('신앙'도 역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일입니다.)
'자기의 것'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제대로 사랑을 하는 것이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자기의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바로 그 '일치'입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도 이웃과 내가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자신처럼'이라는 말을 '자신이니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웃은 곧
나이고, 내가 곧 이웃입니다.
(이웃과 나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곧 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은 나의 고통과 슬픔이고,
이웃의 기쁨과 행복은 나의 기쁨과 행복입니다.
이웃에게는 관심도 없이 자기
자신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냥 이기심일 뿐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만 사랑하는 것은
어떤가?
(자기는 구원받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남의 구원을 위해서 일할 수 있을까?)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죄 없는 사람만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고,
스스로 회개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과 나는 하나이니 함께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사랑'이라는 말과 '계명'이라는 말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데도 '계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사랑한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거꾸로 말하면, 진심으로 사랑하는데도
겉으로는
계명이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으로만 보인다면
진심이 훼손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좋아하는 감정'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신앙인이 실천하는 사랑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세속에서 말하는 사랑과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덕'입니다.
'믿음'은 '믿으려는
노력'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사랑하려는 노력'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입니다.
나의 구원과 이웃의 구원이 모두 목표입니다.
이웃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이웃 사랑이고,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내가 구원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는
"사랑이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마르 12,32-33).
그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고,
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랑이라고 믿는다." 라고 자기 생각을 덧붙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라고 말씀하시는데(마르 12,34),
이 말씀은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가고
있다.",
또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전주교구 신풍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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