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3월 9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 수도자)

dariaofs 2016. 3. 9. 05:30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Francisca Romana, 또는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귀족인 부소(Busso) 가문의 파올로(Paolo)와 자코벨라(Giacobella)의 딸로서 이탈리아 로마의 중심부인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13세 때에 인근의 부유한 영주인 폰치아노(Ponziano)의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와 결혼하여 40여 년 동안 이상적인 결혼생활의 모범처럼 살았다. 그들은 자녀 일곱을 두었으나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금욕적인 기질이 강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흑사병과 내란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할 때, 그녀는 자선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녀는 시누이인 반노차(Vannozza)와 함께 로마의 걸인들을 위하여 조직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하여 높은 성덕을 쌓아 나갔다.


그녀는 성 알렉시우스(Alexius)의 환시를 본 뒤로 앓고 있던 중병에서 회복되었고, 1400년 그녀의 아들인 요한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가 태어날 때까지 산토 스피리투(Sancto Spiritu)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또 다시 흑사병과 기근이 로마에 들이닥쳤을 때, 그녀는 이 재앙의 희생자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의 보석까지 팔았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에 재앙이 닥쳐왔다. 1408년에 대립교황의 편이었던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오(Ladislao)가 로마를 점령했을 때, 여자들은 남아 있었으나 교황의 편에 서 있던 남편 라우렌티우스는 피신해야만 했다. 게다가 폰치아니(Ponziani) 성이 약탈당하고 캄파니아(Campania)의 집도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1413년의 또 다른 흑사병 때문에 아들 에반젤리스타(Evangelista)가 희생되자 그녀는 자기 집을 아예 병원으로 개조하였다. 불행은 계속 이어져 2년 후에는 그녀의 딸 아녜스(Agnes)마저 사망하였다.

1414년경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고, 남편의 추방령도 해제되어 돌아오고 재산도 되찾았지만 남편의 건강은 아주 나빴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남편을 간호하는 한편 그녀의 모범을 따르는 귀족 부인 등과 함께 자선활동을 계속하면서 봉쇄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자선을 실천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로 결정하였다.


1433년 3월 25일, 처음에는 마리아의 오블라티회(Oblate di S. Maria)로 알려졌지만 후에 캄피돌리오(Campidoglio) 근처에 있는 '스페키의 탑'(Tor de' Specchi) 근처에 있다고 하여 토르 데 스페키의 오블라티회로 알려졌고, 다시 현재의 성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오블라티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436년에 남편이 죽자 그녀는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수녀원에 입회한 후 원장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남은 4년 동안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자선 사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녀는 수차례나 환시를 보았고, 탈혼에 빠졌으며, 치유의 기적을 행하였고,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그녀는 대이교의 종말을 예언하였다. 그녀는 1608년 5월 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성녀가 자신의 수호천사를 여러 해 동안 보았다는 이유에서 그녀를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이자 이탈리아 가정주부와 미망인들의 모범으로 선포하였다.



강론   :    (요한 5,17-30)


<생살여탈권>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자(요한 5,1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쉴 수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시던 일'은 창조 작업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즉 안식일에 쉬신 것은
창조 작업을 마치시고 쉬셨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쉬지 않고 일하신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 작업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인간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일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하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생계를 위한 노동은 하지 않는 날이지만
사람을 구원하는 일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해야 하는 날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어떤 장애자를 고쳐 주실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이 말씀의 뜻은, "안식일은 좋은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다."입니다.
('해도 되는 날'이 아니라, '해야 하는 날'입니다.)


사실 '좋은 일'(선한 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날마다 해야 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도 날마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안식일에는 특히 더 잘해야 합니다.


남을 해치는 일과 죽이는 일을 해도 되는 날은 없습니다.
어떤 날이든지 간에 그런 일은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만일에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처럼 아무것도 안 하면,
즉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좋은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되기는커녕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욱 거세게 반발합니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8)."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안 지키는 자'로만 보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과
'하느님의 일'과 '당신의 일'을 같은 일로 표현하신 것을
신성모독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을 안 지키는 것과 신성모독은 모두 사형죄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일 수도 있고,
제자들의 신앙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이 말씀을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모두 '하느님의 일'이다." 라는 믿음을 고백한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다."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1-22)."
이 말씀은 "예수님은 인간들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쥐고 계신 분"이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또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즉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인데,
나중에 재림하실 때에는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실 것입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이 말씀에서 '죽은 이들'이라는 말은, "죽을 운명 속에 놓여 있는 이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마태 4,16))"
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믿음을 실천하면서 사는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살아날 때가 온다." 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의 24절에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24절과 25절은 사실상 같은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이 바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옛날에 하셨던 말씀을 기록해 놓은 과거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은 '지금'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뿌려지는 '생명의 씨'입니다(마르 4,14).
열매를 맺는 것은, 즉 생명이 완성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그 생명이 시작되는 것은 '지금'의 일이고,
그 씨를 잘 가꾸고 보살피고 키우는 것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
"지금이 바로 생명의 씨를 받아들여서 가꾸고 보살펴야 할 때다."
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전주교구 신풍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