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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안수 사랑의 집 원장이 망우체육공원 한쪽에 차려진 간이식탁 위로 식판을 건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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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식한 뒤 활짝 웃는 한안수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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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의중앙선 양원역 인근에 자리한 급식소 사랑의 집. |
애호박을 송송 썰고 새우젓으로 간을 본 애호박 볶음이 어릴 때 먹던 맛 그대로다. 시장에서 막 가져온 얼갈이배추 겉절이는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매운 고춧가루와 부추, 양파로 한껏 맛을 낸 오이소박이도 칼칼하고, 싱싱한 상추 쌈에 불고기를 싸 입에 넣으면 집밥 맛이 살아난다. 어떻게 이 상차림을 급식소 식단이라고 할까.
경의중앙선 양원역에서 길게 이어진 망우체육공원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끝자락에 등장하는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사랑의 집의 식단은 원장 한안수(골룸바, 68, 서울 청량리본당)씨의 봉사철학이 녹아 있는 일종의 ‘작품’이다.
“급식소 음식은 맛이 없다는 편견을 깨뜨리려고 무진 애를 썼지요. ‘한 끼 200원 식사지만, 최고의 식단을 만들자’, 그게 저와 봉사자들과의 약속이에요. 비록 인근 청량리시장이나 대형할인점,
개인 후원자들에게서 기증받아 마련하는 음식이지만 이용자들과 한솥밥 식구로 살기로 했고, 그 약속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졌어요.”
사랑의 집 하루 이용자는 대략 80~100명쯤 된다. 60대 이상 차상위 계층이나 국민기초생활 수급자가 대부분이고, 때로는 노숙인, 장애인도 이용한다.
‘음식을 남기면 벌금 2000원’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 탓인지 음식을 남기는 강심장 이용자는 거의 없다.
이들을 위해 새벽부터 봉사자들이 오는데 대략 10여 명이다. 일주일에 다섯 번, 매일 오는 봉사자도 있고, 두세 번, 또는 하루 나오는 경우도 있어 평균 30∼40여 명이 사랑의 집을 꾸려간다.
물론 한 원장과 주방장 박정숙(수산나, 79)씨는 날마다 나오는데, 마침 박 주방장은 발목 인대를 다쳐 병원에 가느라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도 음식 맛은 변함이 없다.
한 원장이 사랑의 집에 온 것은 2008년. IMF 긴급구제금융이 이뤄지기도 전인 1996년 11월에 생겨난 무료급식소가 운영난에 처하면서 문 닫을 위기에 처하자 그가 봉사자들과 팔을 걷어붙였다.
철로변이어서 부실하기가 짝이 없던 간이건물 급식소에 그가 원장으로 오면서 새 바람이 불었다. 냉ㆍ난방기도 후원을 받아 바꾸고, 냉장고도 대형으로 4개를 사들였다. 가스레인지와 식기 건조기, 조리기구, 주방기기도 새로 갖췄다.
숟가락 젓가락, 물컵은 매일 삶아 건조기에 말려 식탁에 내놓는다. 어수선했던 벽도 깔끔하게 칠을 새로 했다. 바퀴벌레는 어찌나 많은지, 방제를 해도 해도 끝없이 나와 해충 전문 방제업체에 의뢰, 싹 치워버렸다.
인근 시장이나 대형 할인점을 찾아다니며 남은 식재료를 기증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 덕에 후원처도 여럿 개발했다.
막무가내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대낮부터 술에 취해 시끄럽게 하는 노숙자들도 싹 정비했다. 처음에야 노숙자들에게 절절맸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이용자를 대응하는 방법도 익숙해졌고 그런 이용자도 점차 사라졌다.
한번은 노숙자가 문을 뜯고 들어와 고물상에 그릇과 전자레인지 등을 팔아먹은 적도 있다. 하도 화가 나고 당황스러워 경찰에 신고해 잡았지만, 나중에 용서하고 집까지 얻어줬다.
요즘엔 노숙자들이 오히려 자청해 급식소 안팎 청소를 도맡기도 하고, 급식소에서 나오는 폐지를 팔아다가 하루 3000∼4000원씩 벌어 한 원장에게 슬쩍 건네기도 한다.
기적 아닌 기적도 여러 번 경험했다. 주방 봉사자들이 냉장고가 텅텅 비었다고 말하면, 신기하게도 그날로 콩나물이나 오이, 상추, 가지, 아욱, 호박, 감자 등이 하나 가득 채워졌다.
식재료를 공짜로 주겠다고 하면, 서울 가락동이든, 방배동이든, 심지어는 경기도 광주까지라도 달려가 ‘악착같이’ 싣고 가져왔다.
봉사하느라 교통사고도 겪었고, 허리도 퇴행성 협착증에 측만증으로 고생하는 한 원장은 “월급을 받았다면 아마도 힘들어서 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봉사이기에 웃을 수 있고, 힘든 일도 힘들지 않게 했다”고 고백한다.
노년이면 남들 다하는 해외여행을 번듯하게 한 적 없지만, 그는 “봉사할 수 있기에 행복하다”고 전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젊어서는 서울 사근동 등지 판자촌에 구호물품을 나르며 가톨릭노동청년회(YCW) 봉사자로, 중년에는 본당 전례 봉사자나 사회복지분과장으로,
나이 들어서는 나눔의 묵상회나 본당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봉사자로 평생 봉사의 삶을 살았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한때 작은 가내수공업 수준의 일거리로 생계를 해결하기도 했지만, 그의 주업은 봉사였다.
“한때는 수녀회에 가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살아 보니 일생을 동정녀로 살면서 봉사하는 삶도 정말 뜻깊은 삶인 듯합니다. 봉사가 생활 그 자체가 돼 버렸어요.
봉사 없이 어떻게 살아요? 봉사도 어쩌면 중독성이 있는 듯해요. 나 자신도 모르게 의식 속에 봉사라는 유전자가 각인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평생을 봉사와 함께 살아올 수 있었겠지요.”
급식소 이용자들과 살가운 대화를 나누다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을 찍다 보니 천사가 따로 없다.
오세택 기자
▨취재 후기
한안수 원장은 “시쳇말로 흔히, 나누면 배가 된다는데 정말 그런 체험을 많이 했다”고 한다.
나누면 나눈 만큼 이상하게 후원물품이나 식재료가 계속 들어오고, ‘이게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시나브로 후원이 들어오지만,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들어오는 대로 나누고,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원장님은 도대체 뭘 먹고 사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전 이슬만 먹고 살아요” 하고 그는 농으로 받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다. ‘(사도직에의) 투신’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몸을 던진다는 것은 나 자신을 내어놓는다는 뜻이니, 욕심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실 사랑의 집 봉사를 영리로만 본다면, 누가 후원을 하겠는가?
나아가 봉사자 자신의 베풂도 쉽지만은 않을 터다.
아낌없는 사랑이 넘치는 나눔이기에, 후원을 받는 대로 하나도 남기지 않고 건네기에 사랑의 집 밥은 맛있을 수밖에 없다.
한 원장도 때로는 하느님한테 푸념한다. 수시로 찾아드는, 죽을 만큼 아픈 육신의 고통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 제가 견딜 만큼의 통증만 주세요” 하면, 어느새 통증이 씻은 듯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봉사는 기도이고, 기도가 곧 봉사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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