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셸랭 소렐(Tescelin Sorrel)과 몽바르드 영주의 딸 알레(Aleth)의 아들인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는 부르고뉴(Bourgogne) 디종(Dijon) 근교의 가족 성(城)인 퐁텐(Fontaine)에서 일곱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샤티용(Chatillon)에 가서 공부하면서 청운의 꿈을 펼치고 있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많은 충격을 받고서 수도생활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원래 시토회의 설립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지만 흔히들 그를 시토회의 설립자로 부른다.
그가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에 입회한 해는 1112년 4월인데, 그 때 그는 자기 형제 4명을 비롯하여 모두 30명의 친척, 친구들과 함께 베네딕토회 규칙의 엄격한 해석을 따르기 위하여 1098년에 설립된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원장이던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 4월 17일)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1115년에 성 베르나르두스는 성 스테파누스 하딩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부르고뉴와 샹파뉴(Champagne)의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였으나, 그의 높은 성덕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그 수도원의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 바꾸었고,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다.
그 후 성 베르나르두스는 자신의 학덕과 지덕을 활용하여 수도원의 외부 일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립교황인 아나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하여 1130년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디아(Lombardia)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140년부터 그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여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1145년에는 전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수도자였던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어 로마(Roma) 교황청의 남용을 자제하고, 교황이 항상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교황 에우게니우스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랑그도크(Languedoc)에 파견하여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대항하여 설교토록 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 임명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서한과 "아마(Armagh)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그리고 "신애론"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행한 강론은 "아가"로 묶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성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와 신심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는 다양한 기질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us)란 칭호를 얻었다.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선종한 그는 1170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8세(Pius VIII)는 1830년에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이다.
강론 : (마태 23,1-1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과 행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씀은,
그들이 모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서
사람들에게 모세 율법을(성경을) 가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 그들의 직무 수행과 권위를
‘인정’하셨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과 행실이 다른 것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의 직무 수행과 권위를 비판하신 것도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으니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라는 뜻이 아니고,
“누가 전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은 지켜야 하지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대로 아무거나 다
실행하고 지키면 안 된다.
누가 전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은 지켜야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은 따라 하면 안
된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실에 대해서 변명하는 말도 들으면 안 된다.” 라는 뜻이 됩니다.
사실 말과 행실이 다른
사람은 모세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
누가 전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어떤 사람이 전하느냐에
따라서 말씀이 왜곡되거나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모독하는 사람은 모세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나 그 자리에 앉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듣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명확해집니다.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과 행실이 다르다는 것을
식별할 수 있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과 그들의 ‘행실’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도 모르고 하느님의 말씀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을 보고
그 행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인 줄로 알 것입니다.
따라서 그
경우에는 ‘행실’로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우선 먼저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로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삶’으로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복음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서 말로만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 복음을 전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듣는 사람 쪽에서 복음을 거짓말로 생각하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세상 사람들은 ‘신앙인들의 삶’을 보고 우리 교회를 판단합니다.
우리가 ‘진실한 삶’을 살고 있으면 진실한 종교라고
생각하고,
‘거짓된 삶’을 살고 있으면 사이비 종교라고 생각하고...
이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
진실하지
않은 생활을 하는 신앙인들의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실 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2,19).
성전 구실을 못하는 성전은 허물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을 모세의
자리에서 끌어내려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하면,
넓은 뜻으로는 모든 신앙인이 다 해당되지만,
일차적으로는 성직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해당됩니다.
(당시의 유대교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제들과 함께 성직자들 역할을 했고, 종교 지도자로
대우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꾸중과 비판은 성직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은 존경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싫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주교든지 개신교든지 간에 다 싫다고...)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성직자들이 잘못 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고,
넓게 생각하면 교회가 ‘복음적인 삶’을 제대로 살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곧
복음 선포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신앙에서 ‘참 기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일들에서 더 즐거움을 찾고,
어떤 고난과
시련을 만나게 되면 믿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생명보다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더 희망하고 추구하고,
사랑
실천보다는 이기적인 모습을 더 보이고...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을
옛날의 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 당시의 유대교가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우리 교회는 어떤가?”(지금의 나는 어떤가?)가 더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말씀’을 제대로 다 ‘실행’하고
있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 (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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