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새하얗게 빛나시며 영광스럽게 변모
▲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새하얗게 빛나시기 시작했고 하늘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은 폰 카롤스펠트 작 ‘모세와 엘리야 사이의 예수 그리스도’. 출처=「아름다운 성경」 |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서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타보르(Tabor)라 불리는 산이 있습니다. 해발 600m 정도로 아주 높은 산은 아니지만 주위가 모두 평원이기에 우뚝 솟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 산 정상에는 모세와 엘리야의 경당과 함께 예수님의 변모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변모가 일어난 곳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높은 산’이라고 표현하고 루카 복음은 그저 ‘산’이라고만 언급합니다. 예수님의 변모가 일어난 곳이 이 타보르 산인지 과거부터 지금까지 논쟁이 있긴 하지만 전승에 따라 많은 이들은 이곳에서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기념합니다.
마치 시나이 산에 오르는 모세 같아
이 이야기는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오르셨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마르 9,2; 마태 17,1). 이 표현은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집트 탈출 이후 시나이 산에 다다른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습니다. 모세는 계명을 받기 위해 산에 오릅니다.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덮었다. 이렛날 주님께서 구름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셨다”(탈출 24,16).
높은 산에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시나이 산에 오르는 모세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산에 오른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합니다.
복음서는 그 변모를 이 세상의 마전장이도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고 말합니다.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또한 복음서의 문맥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 이후에 미리 보여 주는 영광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째 예고, 그리고 제자로서의 자세와 함께 드러나는 영광스러운 변모는 하나의 주제로 엮여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마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에 화답하는 내용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변모에 함께 등장하는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 성경에서 보이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힙니다.
모세는 탈출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체험을 이끈 예언자이며 하느님께서 미래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보낼 예언자이기도 합니다(신명 18,18 참조). 또한 유일하게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탈출 33,11).
엘리야는 우상이었던 바알 신에 맞서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낸 예언자이면서 하늘로 들어 올려진 인물입니다(2열왕 2,11).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드러낸 두 예언자를 통해 예수님의 변모는 구원을 향한 의미를 갖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
이러한 사건의 마지막에 전해지는 것은 하늘에서 들려 오는 소리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와 비슷한 표현을 예수님의 세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복음서 안에서 중요한 축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표현하는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는 복음서의 시작과 중간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앞으로 받으실 영광을 미리 보여 준다는 점에서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의 영광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모든 이들이 알게 될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세례와 영광스러운 변모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복음서의 처음과 중간, 마지막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계시하는 사건이면서 복음서 안에서 명시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건을 체험한 제자들은 그 영광스러운 모습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가톨릭대 성신교정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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