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6년 12월 14일 가해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dariaofs 2016. 12. 14. 03:30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은 1542년 6월 24일 에스파냐의 아빌라(Avila) 근교 폰티베로스(Fontiveros)에서 직조공이었던 곤살로 데 예페스(Gonzalo de Yepes)와 카탈리나(Catalina Alvarez) 사이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극심한 빈곤과 궁핍 속에서 생활하였고 아버지와 형 루이스(Luis)는 요한이 어릴 때 사망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어머니와 함께 메디나 델 캄포(Medina del Campo)에 정착해 살며 교육을 받았고, 17세 때에는 그곳의 예수회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메디나 병원장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1563년 그는 메디나 델 캄포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이듬해에 성 마티아의 요한(Juan de Santo Matia)이라는 수도명으로 서원을 하였다. 1564년부터 4년간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56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성 요한은 고향집을 찾았을 때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ia, 10월 15일)를 만났다. 그 당시 카르멜회의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해 더 고적하고 깊은 기도생활을 할 수 있는 카르투지오회로 옮기고 싶다는 뜻을 성 요한이 피력하자, 성녀 테레사는 그를 설득하여 카르멜회에 남아 함께 개혁운동을 하자고 권유하였다.

1568년 11월 28일에 그는 두루엘로(Duruelo)에서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도움으로 개혁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성 요한은 카르멜회의 최초 규칙으로 돌아가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하였으며, 이때 이름을 십자가의 요한으로 바꾸었다.


그는 열렬한 기도와 보속의 생활을 하면서 인근 마을들에서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년 뒤 두루엘로에 최초의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보급을 위하여 진력을 다하던 중, 1577년 10월 2일 수도회 개혁을 반대하던 완화 카르멜회 수도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톨레도(Toledo)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1578년 8월까지 9개월간 ‘어두운 밤’을 체험하였다.


이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신비적, 영성적, 문학적인 성장을 이루게 된다. 감옥 안에서 그는 몇 편의 시를 썼다. 9개월 만에 감옥에서 탈출한 그는 개혁 카르멜회의 여러 직책을 맡아 활동하는 한편 저술활동을 계속하였다.


1579년 맨발의 카르멜회는 인정을 받았고 수도원도 세웠다. 그는 바에사에 개혁 카르멜회 대학을 세우고 학장이 되었으며, 1582년에는 그라나다(Granada)의 로스 마르티레스 수도원의 원장을, 1585년에는 안달루시아(Andalucia) 관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1590년 카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었다. 결국 이로 말미암아 요한은 1591년 6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병에 걸려 그대로 에스파냐에 남게 된 그는 그 해 9월 말 우베다(Ubeda) 수도원으로 옮긴 후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은 후 12월 13일 밤 자정이 지난 무렵에 사망하였다.

그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중 한 명이며, 그의 저서들은 가장 유명한 영성신학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중에서도 “카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 등이 가장 유명하다.


요한은 1675년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26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교회학자로,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에스파냐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강론   :   (루카 7,18ㄴ-23)


<구원>


12월 14일의 복음 말씀의 내용은,
대림 제3주일(12월 11일)의 복음 말씀의 내용과 같은데,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의 뒤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전하였다(루카 7,17-18ㄱ).”


이 상황은 요한복음 3장 26절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 제자들이 요한에게 가서 말하였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그때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요한 3,27-30).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계속 증언했지만,
요한의 제자들은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서 시기심이나 경쟁심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루카복음에서는(12월 14일의 복음 말씀에서는)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직접 여쭙게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루카 7,18ㄴ-19).”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한 것이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의심했고,
그래서 직접 보고 믿으라고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오실 분’은 ‘메시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2-23).”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너희는 내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보았으니, 나를 믿어라.”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 말씀은 나자렛에서 선포하신 복음과 비슷합니다.


“...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선포하신 복음 그대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나를 메시아로 믿는다면, 메시아의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신앙인들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이미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증언이었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사도들의 증언이 더욱 중요한 증언입니다.)


사도들은, “주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줄곧 동행한 이들”이고,
“예수님의 모든 일과 가르침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목격 증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말로도 증언했고, 복음서와 편지들을 통해서도 증언했습니다.
우리는 그 증언들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고 있는가? 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그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받기를 바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현세의 인생에서 복을 누리고 사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 갖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는 않고,
자기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믿음과는 거리가 먼,
또는 많이 부족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은
메시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일을 경축하기 위해서이고,
그 구원을 잘 받기 위해서입니다.


성탄절은 해마다 찾아오는 단순한 기념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시작된 날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성탄절을 제대로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救援)’이란 과연 무엇인가?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는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죄와 죽음의 어둠에서 해방되는 일”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살다가 그냥 그대로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그래서 ‘구원’이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허무한 것들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생활입니다.


물론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여러 가지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구원의 시작일 뿐입니다.


궁극적인 구원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얻는 일입니다.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지금의 인생을 아무리 행복하게 잘 살아도 하루살이 인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전주교구신풍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