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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리더를 만나다] (9) 최주봉 요셉 (서울가톨릭연극협회 회장)

dariaofs 2017. 3. 25. 05:30
천생 연기자 50년 오직 한 길, 이제는 봉사의 길도 가렵니다


 


 

▲ 2016년 병인박해 150주년 기념 순교극 ‘요셉 임치백’에서 임치백 역으로 열연하는 최주봉 회장.

 

▲ 최주봉 회장이 지난해 순교극에 함께 출연한 염수정 추기경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 연극 활동에 전념했던 젊은 시절의 최주봉 회장.

 

▲ 20년 넘게 무명 세월을 지냇지만 그 세월의 노력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1970년 연기자 동료들과 함께한 최 회장(맨 앞). 최주봉 회장 제공



51년 연극인생이지만 20여 년은 지독한 무명생활이었다. ‘만수 아빠’, ‘쿠웨이트 박’으로 알려졌지만 수많은 단역 배우로 생계를 위한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반대와 온갖 시련과 고난에도 초지일관 연기자의 길을 걸었다. 그가 지나온 연기 인생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니다. 한 편의 연극이고 드라마였다. 서울가톨릭연극협회 최주봉(요셉) 회장 이야기다.

 

배우는 별처럼 한번 뜨고 지는 스타가 아니라고 한다. 큰 그릇에 한 번 채우는 물이 아니라 지금도 채워가고 있는 물이다.

 

그의 꿈은 계속된다. 배우 최주봉만의 감동과 눈물 그리고 웃음을 남은 연기 인생에서 더 진하고 푸짐하게 펼쳐 보이고 싶다고 말한다.

 

뜨거운 열정으로 신앙을 체험하고 자신과 배우들이 더 많은 봉사를 하게 해달라고 매일 하느님께 기도하며 그는 지금 또 다른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서종빈 기자 binseo@cpbc.co.kr

▶악극으로 연극을 시작하셨죠.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연극에 데뷔해 51년째인데요, 제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해준 곳이 극단 가교예요. 처음에 악극을 했는데 잘 나갔죠. 악극은 노래, 춤, 연기 삼박자가 맞아야 해요. 보여주는 재미가 쏠쏠하죠.

 

6.25 직후에는 악극밖에 없었어요. 어렸을 때 악극의 변사 흉내를 많이 냈어요. 동네 사람들이 모이고 옆집 개들까지 다 모였으니까요.

 

60년대 초중반에 TV가 생겨서 연극을 하던 사람들을 많이 뽑았어요. 저도 학창시절에 오디션 보러 갔었는데 다 떨어졌어요. 돈을 벌어야 해서 중고 트럼펫을 사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랬죠.

▶부모님께서 연기를 반대하지는 않으셨나요.

반대가 왜 없어요. 고등학교 때 고향 예산에 있는 예당저수지로 소풍을 갔는데 선생님이 사회를 보라고 귀띔을 해주시더라고요, 사회를 봤는데 선생님이 연극영화과를 가라시는 거예요. 아버님이 상업을 하셔서 상과를 가려고 했거든요,

 

다행히 중앙대에 한 번에 합격했어요, 아버님께 거짓말을 했는데 합격증을 가져오라고 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했죠. 배우 될 자신이 있다고 했더니 아버님께서 “그 얼굴로 배우가 되겠느냐”라면서 역정을 내시더라고요,

 

 조연이나 단역도 잘하면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해도 허락을 안 하셔서 어머니와 서울에 계신 작은아버지가 간신히 설득해 등록금을 받은 거예요. 제가 8남매의 장남인데 ‘딴따라’ 됐다고 욕을 많이 먹었죠. ‘해 볼 테면 한번 해봐라’였죠.

▶춥고 배고픈 직업인데 후회는 안 하셨나요.

(집에서) 하도 뭐라고 해서 군대 갔다 오면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근데 꼭 해야겠더라고요. 제대 후에 배우의 길을 계속 가겠다고 또 말씀드렸더니 등록금을 줄 테니 과를 바꾸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서 과를 바꾸면 죽도 밥도 안 되니 초지일관 가던 길을 가겠다고 말씀드려서 간신히 허락을 받았죠. 지금까지 후회 안 해요. 내가 좋아서 갔는데요, 내가 나를 알아요, 저는 다른 것은 못해요.

▶무명 생활을 오래 하셨죠.

한 20년 넘게 했죠. 20년 넘게 하다가 탤렌트 시험을 봤는데 얼굴 때문에 계속 떨어졌어요, 당시엔 1차가 무조건 얼굴이었거든요. 오죽하면 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갔는데 심사위원이 어느 절에서 왔느냐고 묻더라고요.

 

코미디언 시험까지 봤고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심지어는 경찰 시험을 봤는데 친구가 순간에 절망하고 경찰 시험을 보면 배우는 누가 하느냐고 해서 결국 경찰 시험 포기하고 엑스트라와 단역을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만수 아빠, 쿠웨이트 박으로 대박이 나신 거죠?

그 전에 일본의 한 연출가가 ‘아타미살인사건’이라고 우리말로 ‘뜨거운 바다’라는 공연을 한국에서 했는데요, 우여곡절 끝에 출연했는데 일본 투어까지 하면서 처음으로 매스컴에 주목을 받았어요,

 

그래서 MBC ‘한 지붕 세 가족’에서 부른 거예요. 원래 딱 한 번 나오기로 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으니까 6년을 했죠. 그때부터 광고가 붙고 2년 후에 ‘쿠웨이트 박’을 한 거예요. 저한테 운명적으로 좋았던 시절이었죠.

 

 ‘쿠웨이트 박’은 내 고향 삽다리에서 고등학교 때 서울에서 온 잘 생긴 대학생이 선글라스 끼고 무게 잡는 기억이 나서 설정을 한 것이고요, ‘만수 아빠’도 고향 동네 세탁소 아저씨 설정을 해서 연기를 한 것입니다.

 

 ‘쿠웨이트 박’ 할 때 부른 노래가 김국환 씨의 ‘꽃순이를 아시나요’인데 원래 하모니카로 부는 것이었는데 제가 워낙 NG를 많이 내서 노래로 바꿔 부른 게 한마디로 대박이 난 것이죠.

▶이후 살림이 좀 좋아지셨죠.

그럼요, 하느님이 도와주셨는지 여러 가지 일거리가 많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 당시는 돈을 벌 수 있는 게 광고 아니면 밤에 나이트클럽 같은 데 가서 노래 부르는 거예요.

 

 ‘쿠웨이트 박’으로 워낙 뜨니까 여기저기 요청이 와서 매니저도 생기고 팬클럽도 생겨서 나를 위해 노래까지 작곡해 준 사람도 있었어요. 그때 제 나이가 마흔 다섯이었죠. 그래서 배우에겐 사양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제가 어머님의 피를 많이 받았어요. 어머님은 멍석 깔아놓으면 소리부터 춤까지 다 하시는 분이었어요. 명랑하시고 재미있는 리더셨죠. 아버님은 반대로 매우 진지하시고 가부장적인 전형적인 충청도 분이셨어요.

 

8남매를 낳고 기르셨는데 우리 집이 장항선 기차길 옆이어서 어머니가 아기를 많이 낳았죠.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막내를 낳았으니까, 나하고 20살 차이예요. 아들(최규환 배우)도 지금 배우가 돼서 연기하고 있는데 전 처음부터 반대하지 않았어요. 연출 끼가 있더라고요.

▶가톨릭에 입교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느 날 제천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를 공연하고 올라오는데 버스 안에서 식은땀이 나면서 가슴이 아픈 거예요. 차를 갓길에 세우고 119 응급차를 불렀어요.

 

원주에 있는 병원으로 가는데 구급차 안에서 ‘이렇게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나더라고요. 옆에 친구인 배우 박인환씨와 후배들이 있었는데 응급실에서 막힌 혈관을 20분 만에 뚫고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이후 집에서 좀 쉬고 있는데 편지함에 성당 안내문 전단이 있더라고요. 아마 같은 동네에 살던 박인환씨가 갖다 놓은 것 같아요.

 

아내에게 성당이 어디냐고 물어서 갔더니 6개월 교육받아야 한다고 해서 공연 계획을 다 빼고 교육을 받았어요. 2011년 5월 7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집안이 원래 가톨릭이셨나요?

집사람은 성당에 다녔고 저는 원래 개신교 집사였어요. 그러다 아픈 이후에 집사람이 성당 나가자고 설득해서 손잡고 나간 것이죠. 일단 마음이 편해졌어요. 매번 기도하는데 모든 일이 잘됐어요.

 

제가 욕심을 안 냈죠. 서울가톨릭연극협회에 총회가 있다고 해서 갔더니 갑작스럽게 저를 회장으로 추천하더라고요.

 

바빠서 할 수 없다고 하니까 명령이라고 해서 했습니다.(웃음) 처음엔 2년만 하라고 하더니 한 게 없다고 더 하래요. 사실 뭐 하나 만들어 놓은 게 없잖아요.

▶세례명이 성실한 아버지의 모범인 요셉 성인이신데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시골에서 누가 저를 데리고 교회를 갔는데 어떤 어른이 저를 보고 “요십아, 요십아!” 그러시더라고요. 요셉의 충청도 사투리인데요, 그때부터 ‘요십이’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고향 집에 가면 어르신들이 아직도 “요십이 왔니?” 그러세요. 그래서 천주교에 입교하고 나서 요셉이라고 한 거죠.

▶지난해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 순교극 ‘요셉 임치백’에서 주인공을 맡으셨죠.

감동도 받고 많이 울었어요. 저를 비유해서 극화한 것 같더라고요.

 

저는 양아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천방지축의 건어물집 아들인데 임치백 성인은 마포의 거부로 아무것도 모르다가 아들 때문에 나중에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 믿은 분이에요.

 

임치백 공연 후에 저 자신이 많이 성숙했어요. 공연 일주일 동안 추기경님도 직접 모셨고요.

▶추기경님께서 포도대장 역할을 하셨는데요, 몇 점이나 주시겠어요.

처음에 추기경님께 죄 많은 사람 역할을 맡기는 것에 의견이 분분했는데 추기경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셔서 역할을 드리게 됐습니다. 대본도 직접 갖다 드리고 며칠 연습도 했는데, 매우 잘하셨어요. 한 70점 드렸어요. 대사도 즉흥적으로 막 하시더라고요.

▶요즘 연예인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은데요, 한 말씀 해주시죠.

요즘 젊은이들은 ‘참을 인(忍)’ 자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조급증이죠. 격언 중에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이 있잖아요. 너무 조급하다 보니까 스타나 배우가 갑작스럽게 되는 줄 아는데 아니거든요. 순리가 있어요. 갑작스럽게 되면 갑자기 꺼져갑니다.

 

스타가 뭐예요. 별이잖아요. 별은 떴다가도 지고, 매일 잘 보이다가 어느 날 안보이기도 해요. 누가 오랫동안 거기에 남아 잘 보이느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속으로 참으면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한 번에 쫙 샤우팅을 해야 합니다. 큰 그릇은 금방 안 채워지거든요. 서서히 채워야 합니다.

▶연기 인생 50년이신데 늘 현역이세요.

현역 같으려고 노력을 하죠. 제가 이달부터 영화를 찍어요, ‘올드깽’이라고 할배 갱단 이야기인데. 박인환, 윤문식씨와 셋이서 함께 출연합니다.

 

 이제까지 연기하면서 남들에게 감동과 눈물, 웃음을 주는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것을 매우 푸짐하게 해서 선사하고 싶어요. 관객들이나 보시는 분들이 ‘그래 저것은 최주봉 아니면 안 돼, 역시 최주봉이야’ 하는 그런 역할을 계속 하고 싶어요.

▶신앙인으로 요즘 가장 절실하게 드리는 기도는 무엇인지요.

많은 기도가 있습니다만 요즘 매일 드리는 기도는 봉사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가톨릭연극협회 회장으로서 ‘하느님 제가 이곳에 있는 동안 보살펴 주십시오.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 배우들과 더 많이 봉사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조그만 공간(사무실)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회장인데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리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공정해야 하겠죠. 편파적이면 안 되죠. 국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 사람 저 사람 아픈데 건드리지 말고 공정하게 다 치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리더죠. 연극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같이 봉사하는데 때로는 섭섭한 것도 많거든요. 배우는 스타가 아닙니다. 공정하게 하는 게 바로 스타이고 리더입니다.



방송 시각

TV : 28일 오후 7시, 29일 오후 11시, 30일 오전 8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