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요한 20,16)
요한 20,11-18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한 돌아섬과 부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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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시신까지 도둑질 당했다고 생각하여, 무덤 밖에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깊은 슬픔에 잠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과 군중들이 만든 죽음의 틀인, 무덤 안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님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뒤로 돌아서자’(20,14), 예수님께서 거기 서 계셨습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무덤 밖에 계십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려면, 내가 바라보는 시선을 완전히 바꿔야 하고, 추구하는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향해야만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20,15) 하고 물으시면서, 눈을 뜨도록 준비시켜주십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당황스러워하며, 불안 속에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20,15).
그러자 또다시 예수님께서 “마리아야!”(20,16) 하고 부르시자, 그제서야 그녀는 ‘돌아서서’, 예수님께 ‘스승님’ 하고 부릅니다(20,16).
첫 번째 돌아섬과 달리 이 두 번째 돌아섬은, 전인격적인 방향전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부르고 찾는 이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친구이자 주인으로서 인사를 건넴으로써, 신뢰와 사랑에 찬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주십니다.
죽음의 틀인 무덤과,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몸이라는 한계 속에서만 주님을 찾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해서 죽으신 주님께서는, 죽음 안에 갇혀 계시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인격적인 초대에 의해, 세상의 원칙과 기준을 뛰어넘는 새로운 관계와 지평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사랑이신 분을 사랑으로 불러야 합니다. 사랑만이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기쁨을,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부활 신앙은 소유와 욕망의 대상이나 결과일 수 없으며, 함께 나누어져야 할 사랑이요 기쁨인 까닭입니다.
나의 애착과 소유와 이기심의 자리에서 돌아서서, 죽여도 죽여지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나눔으로써, 영원의 사랑을 노래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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