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재림>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0-13).”
여기서 ‘제자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마태 17,1).
세 제자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것을 목격했고(마태 17,2),
그래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되었지만,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마음에 걸려서 그것을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은 말라키서 3장 23절의 예언을 근거로 해서,
메시아께서 오시기 전에 먼저 엘리야 예언자가 올 텐데,
아직 엘리야 예언자가 안 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은, “저희는 주님께서 메시아라고 믿고 있지만,
율법학자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아직 안 왔다는 이유로 주님을 안 믿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저희가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로 풀이됩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메시아보다 엘리야가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킨다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은 맞다.”로 풀이됩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라는
말씀은,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엘리야는 이미 왔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엘리야 예언자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의 회개 선포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를 박해하고 죽였다.” 라는 뜻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사람들을 회개시키려고 왔는데,
사람들은 회개하기는커녕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엘리야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죽인 자들은,
내가 메시아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나를 죽일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알아보지 못하다.’ 라는 말은,
능력이 부족해서 못 알아보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죄 속에서 살면서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도 거부하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거부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 곧 엘리야 예언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라는 뜻인데,
이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복음서에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 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사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12월 14일의 복음 말씀에도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다.” 라고 강조되어 있는데,
그것도 역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임무 수행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의 예언자가 박해받고 죽는 것을 내버려 두시는가?”,
아니면, “예언자의 운명은 원래 다 그런 것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당시 사람들을 제대로 회개시키지 못했고,
특히 헤로데 왕실을 회개시키지 못하고 살해당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회개 선포, 즉 회개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와 인도를 받아들여서 회개하는 것은
사람들 자신들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은,
또 세례자 요한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그의 실패가 아닙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고,
그래서 그의 임무 수행은 성공입니다.
2) 하느님은 당신의 예언자가 박해받고 죽는 것을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들이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면서
참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2베드 3,9).
(예언자들에게는 따로 그들의 노고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죄인들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박해받는 일을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의 일이 죄인들 때문에 방해받고 막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죄인들이 자기 자신들의 구원을 스스로 막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9-11).”
3) ‘예언자의 운명’은 원래 그렇게 박해받고 죽도록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운명이나 숙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박해와 죽음은 죄인들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님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마태 21,34-37).”
주인이 종들을 보낸 것은 그들이 ‘존중받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을 죽으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소출을 받아오라고 보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시는 것은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존경하고,
예언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들은 이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혀서 ‘말씀’을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입니다.
그런 일들은 예언자들에게는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한 고난이지만,
‘말씀’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죄인들에게는 지극히 불행한 일입니다.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불행은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전주교구신풍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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