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이 죽자 12지파 대표는 르하브암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스켐에 모인다(1열왕 12,1). 예루살렘 북쪽 50km 지점에 있던 도시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대한 말씀을 들은 곳이며(창세 12,7) 이집트에서 모셔온 요셉의 유골이 안치된 곳이다(여호 24,32).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12지파를 스켐에 소집한 뒤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렇듯 스켐은 초기 이스라엘의 상징적 성지였다. 그런 이유로 르하브암은 이곳에서 솔로몬 후계자로 선언되었던 것이다.
북쪽 지파는 새 임금에게 부역과 세금의 경감을 청한다. 하지만 차갑게 거절당한다. 그러자 모두들 충성을 거부하고 돌아섰다. 르하브함은 부역 감독관 하도람을 보내 수습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붙잡아 돌로 쳐 죽였다(2역대 10,18).
분노의 표출이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르하브암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정예 18만을 선발해 징벌에 나서려 했지만 내부반발로 무산된다. 이로써 왕국분열은 기정사실로 되었다.
북쪽은 10지파 연합체였고 남쪽은 유다 지파 독주에 벤야민 지파가 참여하는 형태였다.
르하브암은 기회를 기다리며 북쪽 지파 응징을 준비했다. 하지만 재위 5년 이집트 침공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성전과 왕궁이 왕창 털렸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영화는 바닥으로 추락한 것이다.
르하브암은 41살에 즉위해 17년간 다스렸고 기원전 915년경 죽었다. 아비얌Abijam이 왕위를 이었다(1열왕 15,1). 맏아들이 아닌데도 후계자가 되었다. 어머니 마아카 영향이었다.
르하브암은 어떤 아내나 소실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다고 성경은 전한다 (2역대 11,21). 왕자가 28명이었지만
일찍부터 아비얌을 후계자로 지목해 뒤를 잇게 했던 것이다.
르하브암의 또 다른 모습이다. 아비얌이 왕위에 오를 때 북쪽은 예로보암 1세가 18년째 왕으로 있었다.
이후 남과 북은 네 차례 전쟁으로 크게 부딪친다. 첫 전쟁은 아비얌의 등극과 함께 시작되었다. 왕국통합이란 명분으로 북쪽을 공격한 것이다.
남쪽 40만과 북쪽 80만은 이스라엘 중앙산지 에프라임에서 맞붙었다(2역대 13,3). 수적으로는 남쪽이 훨씬 불리했지만 전투에서는 이긴다. 북쪽의 정예군 50만을 궤멸시킨 것이다.
이후 예로보암은 재기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죽음을 역대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주님께서 그를 치시니 그가 죽고 말았다(2역대 13,20).
아비얌과 예로보암의 전쟁은 군사력이 아니라 주님의 개입으로 판가름 났다는 암시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마산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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