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인간이 만든 인공적 환경의 총체"다. 수도원은 인공적 환경 속에서 천상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 사는 공간이다. "영혼이 거주할 수 없는 건축, 그것은 박제이며 세트일 뿐이다"는 건축가 승효상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수도원 건축에는 수도사들의 이상이 담겨 있다. 수도원은 단지 수도사들의 생활공간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담금질하는 예술적 공간이다. 수도원의 이상이 건축을 통해 명료하게 드러난 곳이 퐁트브로 수도원이다.
7월 중순 월요일 아침 프랑스의 하늘은 맑았다.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아름다운 선율, 수도사와 방문객들과 헤어짐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솔렘 수도원을 떠나야 했다.
서둘러 수도원 차고에 도착했을 때, 자동차 왼쪽 뒷바퀴에 펑크가 나 있었다. 여행 도중, 그것도 낯선 땅에서 자동차 고장이라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도미니칸 수도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타이어 교체가 끝나갈 무렵, 소식을 들은 솔렘의 수도사 두 분이 장비를 가득 들고 달려왔다.
수도원이 자급자족의 공간임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한국에 비하면 프랑스는 느리고 불편한 나라였다.
솔렘을 떠난 우리는 남서쪽으로 향했다. 독특한 제도로 페미니스트적 관심을 받고 있는 퐁트브로(Fontevraud) 수도원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길가에서 마주치는 마을마다 모든 것이 문화유적 같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자동차로 1시간 30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몇 시간이 걸렸는지 알 수 없었다. 길 위의 나지막한 언덕,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숲 속엔 옛 성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고, 길 아래로는 비취색 강물이 유영하고 있었다.
루아르(Loire) 강이었다. 우리는 어느덧 앙제를 지나 소뮈르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젖줄인 루아르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을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의 정원' 또는 '프랑스의 요람'이라 부른다. 루아르 강은 프랑스 동남부 고원에서 시작하여 중남부 중앙 평원을 지나 낭트에서 바다와 만난다.
무려 1020km이나 되는 강을 따라 형성된 계곡 너머엔 숲과 평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루아르 강의 풍부한 물은 대지를 넉넉히 적시고, 밀과 포도로 프랑스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루아르 계곡을 따라 오를레앙과 블루아, 투르, 쉬농, 소뮈르, 앙제 등 역사적인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중세 유럽 건축은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무려 300개가 넘는 성들이 이 마을들을 중심으로 축조되었다.
특히, 샹보르 성과 앙부아즈 성, 빌랑드리 성, 슈농소 성은 건축학적으로 매우 빼어난 건축물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모태가 된 샹보르 성에는 프랑스 왕가의 권위와 위엄이 서려 있다.
프랑수아 1세는 이 성을 건축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포함하여 수많은 이탈리아 건축가들을 불러들였다. 140년이나 걸려 이 성을 건축했고, 무려 440개의 방을 만들었다고 하니 프랑스 왕가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되었다.
16세기 중엽 왕실이 파리로 옮겨지기 전까지 루아르는 프랑스 권력의 중심지였다. 인걸은 간데 없지만 천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에는 중세 건축의 아름다움이 숨 쉬고 있었다.
투르 방향으로 루아르 강을 따라 올라가면 소뮈르가 나오고, 곧 뒤마의 소설 『몽소로 부인』의 배경이 되었던 몽소로 성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언덕을 넘어 왼쪽으로 돌아가면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그 오른쪽에 한 때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했던 퐁트브로 수도원이 앉아 있다.
"Font Evraud"로 알려진 '우물'에서 유래한 퐁트브로(Fontevraud)는 1101년 프랑스 북서부 아르브리셀 출신의 로베르(Robert of Arbrissel)에 의해 설립되었다.
교회 개혁가였던 로베르는 숲 속에서의 독신 수도생활과 라 로에(La Roe)에 수도원을 세웠던 경험이 있었다. 그의 훌륭한 인품과 신앙은 항상 많은 제자와 후원자를 불러 모았다.
수도원 건축을 위해 푸아티에(Poitiers) 주교의 지지는 물론 지역의 귀족과 많은 후원자들이 포도밭과, 방앗간, 심지어 영주의 권리증까지 내놓았다.
퐁트브로 수도원은 남녀 수도사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였다. 1115년부터 36명의 수도원장을 배출했는데, 모두가 여성이었다.
퐁트브로의 수도사들은 기본적으로 베네딕트 규칙에 따라 생활했지만, '왕립 수도원'(Royal Abbey)으로 존재했다. 수도원은 초기부터 번영했다. 12세기 말에는 프랑스 서부에만 123개의 자매 수도원을 두었고, 영국과 스페인에도 5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13세기에는 500명 이상의 수녀와 100명의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영적 삶을 살았다. 13-14세기에 수도원은 위기를 겪었지만 평화가 유지되었다.
15세기 있었던 마리아(Marie of Brittany)의 수도원 개혁과 더불어 퐁트브로는 프랑스 혁명 때까지 프랑스 중원의 왕자로 군림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수도원은 문을 닫았지만, 아직도 많은 건축물이 건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