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한 마디로 지옥의 불구덩일 향해서라도 당신을 따라나섰을 것이며, 또 앞서기도 했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까닭입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에 담긴 중세 수도사 아벨라르와 수녀 엘로이즈의 숭고하고도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아벨라르는 20대에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 반열에 올랐고, 중세의 '보편논쟁'을 평정한 인물이 아닌가!
그리고 엘로이즈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두루 섭렵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이 아니었던가! 결혼을 통한 세속적 사랑엔 실패했지만, 그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수도사와 수녀가 되어서도 결코 식지 않았다.
천병석 교수와 나는 중세의 천재 아벨라르가 의탁했던 곳, 두 사람의 전설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묻어 있는 클뤼니 수도원(Cluny abbey)으로 향했다. 우리는 중세 신앙인들의 영적인 세계를 엿보고 싶었다. 그들의 기도와 침묵, 종교적 헌신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런데 왜 프랑스 수도원인가? 프랑스는 중세 유럽 수도원 개혁의 중심이었다. 아니안의 베네딕트 개혁을 시작으로 클뤼니 수도회와 시토 수도회, 카르투지오 수도회 등이 각자의 방식으로 수도원을 개혁했다.
특히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은 11-12세기 유럽의 종교 지형을 바꾸어 놓을 만큼 그 영향력이 컸다. 우리는 중세 프랑스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회의 탄생에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개혁 정신을 찾고 싶었다.
라 투레트 수도원의 아침은 조용했다. 우리는 옛 수도사들이 사용하던 방을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막상 떠나려 하니 라 투레트에서 만난 수도사들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지난 밤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클뤼니 수도원은 자동차로 1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 한 여름 부르고뉴의 하늘은 맑았고, 태양은 강렬했다. 자동차는 평원과 낮은 구릉을 반복해서 달렸다. 주변으론 온통 포도밭과 목초지였다. 종종 해바라기밭이 나타났을 뿐이었다.
클뤼니가 다가오자 그곳 지형이 무척 궁금했다. 한 때 유럽에서 가장 큰 수도원은 과연 어떤 곳에 자리하고 있을까? 우리의 목적지는 클뤼니 수도원이었지만 자동차는 중세를 고스란히 담은 클뤼니 타운을 관통하고 있었다.
클뤼니 타운은 작은 마을이지만 길 양옆엔 가게들이 수백 미터나 늘어서 있었다. 클뤼니 수도원이 세워지자 그 주위에 생겨난 마을이 클뤼니가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클뤼니 타운 동쪽 한 모퉁이에 중세의 수도원 하나가 서 있는 것 같았다.
클뤼니 수도원은 910년 경 아키텐 공작이자 마콩(Macon) 백작 기욤(Guillaume)이 클뤼니 지역에 땅을 기증함으로써 건립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도원의 진정한 창시자는 초대원장인 베르노(Berno)라 할 수 있다.
그는 기니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봄 수도원을 개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장을 역임한 경험도 있었다.
한 때 그는 로마로 달려가 교황을 알현하고, 수도원 개혁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수도원 개혁을 향한 이러한 열정과 더불어 클뤼니는 시작부터 수도원 개혁에 주력했다.
당시 수도원 개혁의 화두는 세속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였다. 귀족과 국왕, 그리고 황제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수도원의 독립을 획득하고, 베네딕트 규칙에 따른 수도생활을 준수하는 것이 바로 수도원 개혁이었다.
기욤은 클뤼니 수도원에 땅을 기증하면서 다음과 같이 문서로 서약했다. "이곳에 모인 수도사들은 어떠한 세속 권세의 멍에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니, 심지어 나라 권세에도, 내 친족의 권세에도, 국왕 폐하의 권세에도 매이지 않을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의 재산은 오직 "성 베드르와 성 바오로에게 " 즉 로마교회에 속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주차장에 차를 댄 우리는 수도원 입구로 향했다. 마치 거인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거대한 건물이 동서로 뻗어 있었다. 건물의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수도원 안으로 들어선 우리는 옛 교회당을 찾았다.
동쪽 입구로 들어서서 서쪽으로 걸었다. 오른쪽으로 회랑이 있었고, 왼쪽으로는 다양한 강당이 서 있었다. 웅장한 건축물과 그 속에 수놓듯 자리한 아름다운 조각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정수를 보는 듯했다. 한 장면이라도 더 카메라에 담고 싶어 분주히 움직였다. 우리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수도원 교회당을 찾았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에서 12세기 말 전성기 때의 클뤼니 수도원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클뤼니의 수도원 교회당은 일반적으로 클뤼니 I와 II, 그리고 III로 불린다. 클뤼니 II는 953년 헝가리의 침입으로 파괴된 후 다시 건축된 것이고, 마지막으로 지어진 교회당이 클뤼니 III이다.
1088년 수도원장 후고가 시작한 클뤼니 III는 1130년에 완공되었다. 이 거대한 로마네스크 건물은 1200개의 기둥과 조각으로 이루어졌고, 무려 1만 명의 수도사들이 함께 모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다.
평수사들과 수도사들은 채석장에서 바위를 캐고 다듬어 거대한 수도원 교회당을 건축했다. 그들이 건축재료로 바위를 고집했던 것은 오로지 튼튼한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바위를 통해 하나님과 신앙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느님의 속성은 '반석'처럼 강할 뿐만 아니라 변함이 없으시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이름에 담긴 뜻이 바로 반석이 아닌가!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태복음 16:18)고 하지 않으셨던가. 이뿐이 아니다.
교회당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도록 동서로 길게 세워져 있다. 빛이 동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상징이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낸다. 수도원의 건축과 수도사들의 삶에는 어디에나 영적인 지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