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론 말 씀

2019.05.31.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dariaofs 2019. 5. 31. 05:31



오늘 지내는 방문 축일의 말씀들 안에는 기쁨이 일렁이고 즐거움의 환호성이 터져나옵니다. 복음에서는 두 여인의 입으로, 독서에서는 예언자의 입으로 구원의 기쁨을 미리 노래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삿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루카 1,41) 표면적으로는 두 여인이 만났지만 그녀들의 몸 안의 생명들이 서로를 알아봅니다.


특히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은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44) 훗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이렇듯 태아 적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 성자의 육화가 마리아와 요셉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감지되는 순간입니다. 피조물로서 하느님을 영접한 이때, 이 엄청난 은총에 대해 기쁨 말고 달리 무엇을 더 표출할 수 있겠습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칭송합니다.


아이 못낳는 여자로 인생의 고초를 눈물로 삭히며 살아왔을 엘리사벳의 입에서 나온 '믿었으니 행복하다'는 말의 무게는 결코 적지 않습니다.


당장 드러나지도 보이지도 않는 약속을 믿고, 또 그 믿음 때문에 명예와 목숨을 건 여정이 행간에 숨어 있다는 걸 두 여인은 압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 비슷한 체험 안에서 믿음을 견지한 투쟁을 치열히 견뎌온 이들도 또한 압니다. 그러니 이 행복 선언은 풍랑 중에 믿음의 강을 건너온 우리 모두를 격려하고 칭송하는 말씀입니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마리아는 기쁨의 이유를 이렇게 외칩니다. 비천함!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존엄합니다. 그런데 존엄한 동시에 비천합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는데 우리의 선택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지요.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에서 오는 자기 파괴적인 비하 말고,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비천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영혼은 강인합니다.


그는 꾸임 없이 담백하고 겸허하게 진실을 직시하면서 믿음이라는 한 조각 나룻배로 폭풍이 몰아치는 해협을 능히 건널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순간을 그리면서 복음이 피조물인 인간 편에서 터져나오는 기쁨을 드러냈다면, 독서는 하느님의 기쁨을 부각시킵니다. 과연 조물주와 피조물의 만남에서 누가 더 기쁠까요?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스바3,17)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해 보셨습니까?


우리 때문에 하느님께서 이토록 기뻐 뛰십니다. 우리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며 환성까지 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살고자, 하나가 되고자 저 하늘 끝에서 달려오신 분이십니다.


때 묻고 탁해지고 무뎌진 우리가 스스로의 자격 없음을 떠올리며 엉거주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 더 따뜻한 포옹과 더 깊은 입맞춤으로, "당신 사랑으로" 다시 "새롭게 해"(스바 3,17) 주시고 온전히 품어주시는 분.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의 축일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충실한 두 여인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과 피조물의 기쁨을 관상하며 함께 기뻐하는 날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한 가운데 계시고 이로써 구원이 선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함께 기뻐합시다. 우리 앞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때문에 이토록 기뻐 뛰시니 우리도 그분과 함께 기뻐 뜁시다. 구원은 지금 이 순간, 이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파티마에서 벗님들을 기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