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질서 안에서는 내 편과 네 편의 구분이 명확했습니다. 가족과 부족을 지키기 위해 우리 공동체에 호의를 지녔는지 아닌지 판단해서 태도를 달리했지요.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는 태도는 얼핏 상식적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것 없는, 그래서 크게 문제될 것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평범해 보이는 "상식"에 균열을 일으키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마태 5,44)
원수라면 이미 나와 가족, 부족 공동체에 해를 입힌 사람입니다. 앞선 가르침(어제 복음)대로 복수는 포기한다 치더라도 사랑까지 명령하시는 건 당시 사람들에게 좀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워낙 사랑이라는 게 감정과 의지, 정신 등의 복합적 실재라 명령형이 어색하기도 한 데다가, "사랑"은 "원수"에게 그다지 합당치 않은 보상으로 보이니까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어리둥절한 청중에게 예수님께서 자상히 동기를 부여해 주십니다. 자녀가 육신의 부모를 닮는 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닮는 건 당연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하시면서, 자녀로서의 신분과 자격에 걸맞는 모습을 제시하십니다. 그러니 이 명령은 강요가 아니라 이미 격려에 더 가깝습니다.
아버지의 완전성.
그분께는 예외가 없으십니다. 누구도 당신 사랑에서 소외시키지 않으십니다. 구분도 차별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완전히 사랑하십니다. 완전한 사랑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우리가 그 완전성에 물들어 하느님 아버지처럼 되길, 하느님이 되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마케도니아 교회가 헌금에 임했던 내적 외적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오로에 의하면 마케도니아 신자들은 환난과 큰 시련, 극심한 가난 중에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고 합니다.(2코린 8,2 참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성도들을 위한 구제 활동에 참여하는 특전을 달라고 간곡히"(2코린 8,4) 청하기까지 했다니 놀랍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모습을 "은총, 은혜로운 일"(2코린 8,1.6.7)이라 부릅니다.
제 주머니 사정을 먼저 고려하기 마련인 인간에게 어려움 중에 나누고 희사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은총이 아니고서는,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힘 닿는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기꺼이 내놓았습니다."(2코린 8,3)
마케도니아 신자들이 발휘한 이 나눔 정신을 오늘 복음 말씀에 대입해 보려고 합니다. 나눔이나 희사는 사랑의 한 표현이지요. 어쩌면 우리가 이웃이나,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는 것은 "힘 닿는 대로" 할 수 있는 실천일 겁니다.
조금만 마음을 쓰면 서로 사랑을 주고 받으며 관계성이 더 유쾌하고 깊어질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건 "그 이상으로 기꺼이" 내놓는 모습일 겁니다.
감정을 넘고 본성을 이기는 의지와 노력이 요구되는 실천이지요. 나에게 해를 입히는 이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해 주는 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희사, 자선, 나눔의 실천일 겁니다. 바로 하느님의 완전성을 닮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 모두 "은총"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랑을 받고 도움을 받을 때 자기가 은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은총을 받았기에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자기도 정말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도움이 더 필요한 이에게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건, 믿음과 연민의 은총이 그의 영혼에 가득 충전된 상태기에 가능한 일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원수와 박해자를 사랑하라는 권고 앞에서 자신이 없어진다면, 아직 내 사랑이 그럴 수 있을 만큼 크지 못했을 뿐이니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 사랑을 키워서 완전하게 하실 수 있는 분께 은총을 청합시다. 은총이 사랑을 가능케 하고 사랑이 아버지의 완전성으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니까요.
오늘도 완전하신 아버지를 닮아 완전해지려고 애쓰는 자녀인 벗님을 축복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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